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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07]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고전 15:10 ) - 청주 은혜 빛 교회


제가 2008년 1월 13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후 지난 11년 7개월 동안 주일마다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오늘 2019년 7월 7일 주일 청주 은혜 빛 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설교를 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최홍순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최홍순 목사님이 오늘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오늘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제목으로 간증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죄와 허물밖에 없는 죄인중의 괴수이지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너무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저는 한평생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삶을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고 행복하게 살아오고 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고백을 저의 고백으로 삼으면서 매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러면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10 가지 중에서 첫 번 5가지 은혜에 대해서 40여분 동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신의주에서 지낸 저의 유아 및 유년 시절”의 추억들을 살펴봅니다. 저는 유아 및 유년 시절에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살았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으로 1938년부터 신의주 제이교회의 부목사님으로 나중에는 담임 목사님으로 9년 동안 목회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1살 때부터 9살 때까지 신의주에서 살게 되었는데 아기 때부터 한 평생 한경직 목사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은 것은 너무나 큰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장난꾸러기였습니다. 신의주에서 살던 유아 및 유년 시절 동네 친구들을 이곳 저곳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심한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중국 사람들이 가꾸던 토마토 밭에 들어가서 몰래 토마토를 따서 먹으면서 좋아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길가에 조그만 웅덩이를 파고 웅덩이를 종이와 흙으로 덮은 다음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웅덩이에 빠지는 것을 보고는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동네 친구들을 데리고 교회당(신의주 제이교회) 지붕 위와 교회당 맨 꼭대기에 올라가서 놀다가 누가 대변이 마렵다고 하면 저는 대변을 종이에 담아서 멀리 던져 남의 집 지붕 위에 떨어지게 하는 못된 장난까지 쳤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잔 소리나 야단을 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심한 장난꾸러기였는데 심한 장난꾸러기의 기질도 은혜를 받으면 두려움 없이 막 뚫고 나아가는 모험적인 신앙의 기질로 승화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후에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심한 장난을 치면서도 신앙생활은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유치부 시절 어느 성탄절에 교회에서 알타반 박사에 대한 성극을 공연하는 것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는데 그때 받은 감동을 평생 지니게 되었습니다. 유치부 어린이 시절 제가 들은 “알타반아! 알타반아!” 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결국 목회자가 된 후에도 저는 알타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교회에서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신의주에 있을 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일제 시대와 공산주의 시대에 자주 감옥에 투옥되어 감옥 생활을 하셨는데 신의주에 있을 때 저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갇혀 있던 감옥을 자주 찾아가서 감옥 담장 밖에서 목청을 돋아서 노래를 부르며 “아버지이! 아버지이!” 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그때 제가 자주 부르던 노래는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라는 노래였습니다. 저는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보고 싶어하면서 그때부터 예수님을 잘 믿기 위해서는 감옥에도 가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며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저에게 잔소리는 고사하고 타이르는 말씀도 별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저를 칭찬해 주시며 격려하신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의주와 평양에서 저의 아버지의 목회의 삶과 감옥의 삶을 바라보면서 새벽기도와 주일성수와 순교신앙의 유산을 내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체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아버지는 잔 소리를 하신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모든 것을 제가 스스로 하도록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자발적으로 또는 창의적으로 무엇을 하곤 했습니다. 결국 저는 공부도 잘 했고 놀기도 잘 했고 글도 잘 썼는데 글을 잘 쓴다고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부족한 저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아 너무나 컸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에게 물려주신 믿음과 사랑의 유산이 너무나 귀중했습니다.





두 번째로 “평양에서 지낸 저의 소년 시절”의 추억들을 살펴봅니다. 제가 10살 즉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47년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이사 왔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신의주 제이 교회를 사임하시고 평양 서문밖 교회로 부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공산주의 정부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강량욱 목사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평양 감옥에서 감옥생활을 하시다가 나중에는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탄광에 투옥되어 중노동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끔 아버지를 면회하러 어머니와 함께 사동탄광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남루한 죄수 복을 입으신 아버지를 몇 번 만나 뵈온 기억이 납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 신앙적인 감화를 은은하게 받았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감옥에 가는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는 교훈을 말이 아닌 삶으로 전수받았습니다. 제가 평양 제5인민학교를 다닐 때 벌을 서고 정학을 당하면서도 주일성수를 끝까지 고수했던 이유도 바로 아버지로부터 받은 신앙적인 감화와 교훈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더욱 더 열심히 했습니다. 평양은 바로 주기철 목사님과 최봉석 목사님께서 1944년 4월 21일과 25일에 순교하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에게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신앙의 씨앗을 심어주신 분들이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이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선생님들의 말씀을 잘 들었는데 선생님들이 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했습니다. 교회에 와서 유리창을 닦으며 청소를 하라고 하면 청소를 했고, 새벽기도를 하라고 하면 새벽기도를 했고, 주일날 공부를 하지 말고 물건이나 음식을 사지 말라고 하면 공부도 하지 않고 물건이나 음식도 사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들을 수 있는 귀와 순종할 수 있는 마음과 몸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양 제 오 인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일요일 날 학교에 등교하라는 명령을 매주 받았지만 2년 동안 일요일 날 학교에 등교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섰고 때로는 정학을 받았지만 주일날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학교 오후 예배 시간에 누구든지 기도하라고 하면 제일 먼저 제가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주일 저녁 어른 예배시간에 때때로 제가 나가서 “간증” 또는 “발표”를 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저를 가장 많이 사랑했지만 평양에서도 저에게 잔소리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공부를 잘 하라고 또는 신앙생활을 잘 하라고 타이르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저는 평양에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저는 저를 믿고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신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깊은 사랑과 존경을 표합니다. 잔소리보다는 순수한 사랑과 격려가 그 무엇보다 귀하다는 것을 저는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잔소리를 많이 듣고 자란 어린이들은 자발성이나 창의성보다는 짜증과 불쾌감을 지니고 소극적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바로 드리면서 살기 위해 11살 때인 1948년 8월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북에 남겨 두고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는데 제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저를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로 이루어진 것을 저는 잘 압니다. 제가 평양을 떠나기 전에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가서 주일을 바로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저를 한 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를 너무 사랑하시면서 저 없이는 못 살겠다고 늘 말씀하시던 어머니도 울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저의 모험적인 기질을 잘 아시는 어머니가 제가 떠나기 전 저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 위험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를 믿고 저를 멀리 떠나 보내시는 슬픔과 아픔을 지니신 부모님께 저는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평양을 떠나 기차를 타고 해주로 오면서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지니면서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좋은 목사님이 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미지의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면서 저의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습니다. 해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 날 밤 어른들 5,6명과 함께 38선을 넘게 되었습니다. 안내원을 따라서 조용 조용히 국경을 넘다가 우리 일행은 국경경비 군인들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모두 손을 들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 수가 없었습니다. 국경을 넘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혼자서 남쪽을 향해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언덕을 넘고 긴 파 밭을 달리고 목에 차는 강을 건너면서 계속해서 달렸습니다. 저는 조금도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약간의 스릴까지 느꼈습니다. 아마 3,40분 동안 달린 후 저는 남 조선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11살 때 혼자서 38선을 넘은 사건은 그후 저의 평생의 삶의 성격과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움 없이” “모험적으로” “막 뚫고 나아가는” 삶이 저의 삶의 모습이 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남쪽에 와서 어느 작은 초가집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젊은이가 저에게 다가와서 어디 가냐고 물었습니다. 서울로 간다고 했더니 어떻게 가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같이 오던 어른들이 모두 잡혀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저를 서울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청년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왔습니다. 서울 역에 도착했을 때 저는 화려한 모습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청년의 친절한 안내로 서울 중구 을지로 3가 7번지까지 무사히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수년 전부터 서울에 와서 사시던 이모님 집이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이모님을 반갑게 만나게 되었고 이모님 집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서울에서의 나그네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후에 나를 서울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준 그 청년을 찾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애를 썼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청년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천사”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저의 길을 선한 길로 인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랜 후에 저의 한 평생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을 선한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생각과 인도하심을 묵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다윗의 고백을 너무너무 좋아하게 되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시 139:17).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서울에서 지낸 저의 소년 시절”의 추억들을 살펴봅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살면서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지만 처음 2년 동안 저는 밤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주일을 성수하면서 마음껏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았고 너무 감사했습니다. 주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영락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고 주중에도 모든 예배에 참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주일성수는 계속해서 철저하게 했습니다.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너무 반가웠는데 한경직 목사님은 평생 부족한 저를 사랑으로 품어주신 귀한 스승이셨습니다.  


저는 서울에 와서 방산국민학교 5학년에 입학하여 2년 동안 공부했는데 저는 공부도 잘했고 운동도 잘해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고향을 떠난 고아와 나그네로 외로움을 지니고 살았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당당하게 명랑하게 적극적으로 살았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학교의 친구들은 제가 부모가 없는 고아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훌륭한 부모가 있는 학생처럼 당당하게 행동했습니다. 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제가 이북 사투리를 한다고 반 친구들의 놀림을 당한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 어떤 친구가 저를 계속해서 놀려서 제가 그 친구에게 학교 뒷마당에 가서 싸움을 하자고 했습니다. 결국 반 친구들이 학교 뒷마당에 모두 모였습니다. 반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그 친구를 때려눕혔습니다. 제가 이겼습니다. 그 후부터 그 친구는 저를 놀리지 않았고 반 친구들은 저를 더욱더 부러워했습니다. 운동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고 공부도 내가 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반에서 두 명씩 뽑아서 남산에 가서 과학 경연대회를 한 일이 있었는데 제가 뽑혀서 간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있어서 평생 신앙생활이 첫째이고 공부는 둘째였는데 저는 공부도 잘 해서 그 당시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던 서울중학교에 어렵지 않게 합격했습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엉뚱한 일을 하나 한 일이 있었습니다. 중구청에 가서 주민등록을 하는데 구청 직원이 저보고 “본”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본”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떨결에 내 “본”이 “남양”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평양에 있을 때 남양 군도에 살던 토인들이 등장하는 만화를 아주 좋아했는데 갑자기 남양군도가 생각나서 나의 본이 “남양” 이라고 대답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 본은 “김해”인데 저는 평생 “남양” 김씨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합동신학대학에서 “은퇴 기념논총”을 나에게 증정할 때 “남양 김명혁 목사 은퇴 기념논총” 이라는 제목을 사용했습니다. 제 딸은 “남양” 김씨 가문이 자기 대에서 끊어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무엇이나 주저주저 하는 대신에 얼떨결에 이리로 저리로 막 달려가곤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서울중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도 잘 했고 엉뚱한 짓도 잘 했습니다. 어느 날 교실에서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두 손을 망원경처럼 둥글게 만들어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국어 선생님이 나를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은진 미륵같이 생긴 놈이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나를 책망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들의 말씀을 잘 들었고 특히 김원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었는데, 일찍 일어나서 깨끗하게 부지런하게 책임 지키며 살라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려고 평생 노력을 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저의 평생의 삶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깨끗하게 부지런하게 책임 지키며 사는 것이 저의 삶의 철학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김원규 교장 선생님이 초청해서 말씀을 전하게 하신 변영태 교수님(후에 총리)의 말씀을 들었는데 변영태 교수님은 절약하면서 검소하게 살고 운동을 하면서 건강하게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치약도 절약해서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본래 다른 사람들의 말을 너무 잘 듣는 터라 그렇게 살려고 평생 힘썼는데 저는 평생 절약하면서 검소하게 살게 되었고 지금도 양치할 때 치약을 절약해서 조금씩 사용하곤 합니다.


저는 최근에 저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처럼 절약하면서 검소하고 소박하게 사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릇 씻은 물도 버리지 않고 화분에 주는 물로 사용하고, 음식을 남기지 않고 다 먹고 먹다 남은 음식을 버리지 않고 냉장고에 두었다가 다시 먹고, 오래 입은 낡은 옷도 버리지 않고 오랫동안 입고, 18년 동안 타고 다니는 아반떼 자동차가 39만 km나 달렸는데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운전하며 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11년 동안 전국을 운전하면서 다니는데 3분의 1 이상은 뉴트럴 즉 중립으로 다니면서 휘발유도 절약하고 자동차의 엔진도 쉬게 하고 공해도 줄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청주 양성교회에 다녀왔는데 가는 일이 113km인데 60km를 달릴 수 있는 적은 분량의 휘발유를 사용했습니다. 저는 외국 곳곳으로 여행하며 호텔에 묵을 때 며칠 동안은 침대의 이불을 갈지도 말고 청소도 하지 말라는 “청소를 하지 마시오” 라는 푯말을 문밖에 붙여놓곤 합니다. 저는 국내는 물론 외국의 산이나 해변을 거닐 때 항상 커다란 쓰레기 봉투를 가지고 다니면서 쓰레기를 가득 담아서 가지고 와서 쓰레기통에 버리곤 합니다. 저는 평생 절약하면서 검소하게 깨끗하게 살고 있는데 일회용 면도기를 20번 이상 사용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로 “대구에서 지낸 나의 소년 시절”의 추억들을 살펴봅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월남한지 2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인민군들이 탱크를 타고 서울 시내를 지나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미국 비행기 B 29가 하늘을 나르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고 B 29의 폭격도 눈 앞에서 목격했습니다. 제가 들어갈 수도 있었던 방공호가 폭격으로 인해 무너진 것을 눈으로 목격하기도 했고 폭격으로 인해 사람들이 길가에 쓸어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전쟁의 불행과 전쟁의 비극을 직접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6.25 전쟁으로 인해 서울을 떠나 피난민 대열에 끼어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모부님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 사장님의 봉고차를 함께 타고 사장님 가족과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부산까지 내려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만원이 된 기차를 겨우 타고 또는 걷기도 하며 힘들게 피난을 가는데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편하게 갔으니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부산까지 내려가는 길에서도 폭탄이 터지고 길가에 쓸어지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전쟁은 불행한 것이고 비극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부산까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부산에서 몇 달 동안 피난 생활을 하다가 우리는 대구로 옮겨와서 3년 동안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구에서 셋방 하나를 얻고 한 방에서 불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모님이 시장에 나가서 옷감 장사를 하며 돈을 잘 벌어서 차츰 어려움이 없는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3년 동안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새벽기도는 거의 빠지지 않았고 주일날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정성껏 드렸고 봉사와 전도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셋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새벽마다 대문을 열고 잠그지도 않고 교회로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서 대문을 잠그는 방법을 알아내었습니다. 결국 저는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새벽마다 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서 대문을 잠그고 교회에 가서 마음껏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언제나 신앙생활이 첫째였고 공부는 둘째였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처음에는 대구제일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 때 어린이 사역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안성진 목사님이 어린이 사역을 담당하시고 어린이 사역에 관한 모임도 주관하셨는데 저는 그 때부터 안성진 목사님을 평생 사랑하며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구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여러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 때 대구에는 SB(Sister/Brother) 즉 누나와 동생을 맺는 것이 유행했는데 대구제일교회에 다니던 누나뻘 되는 주명숙이라는 고등학생이 나하고 누나와 동생을 하자고 했습니다. 저를 귀엽게 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주명숙 누나는 그 때 제가 다니던 영남중학교 교장인 주덕근 교장 선생님의 딸이었습니다. 저는 누나와 친하게 지냈는데 누나는 저를 누나 집에 데려가서 음식도 해 주고 선물도 주고 제 손수건도 빨아주었습니다. 저는 그 때 사과 껍질을 깎는 법을 누나에게서 배웠습니다. 즉 칼로 사과를 톡 친 다음 껍질을 깎는 법을 배웠는데 저는 지금도 그렇게 사과 껍질을 깎곤 합니다.  


제가 대구에서 잊지 못할 귀중한 추억은 한국의 무디라고 불리던 이성봉 목사님을 만난 일이었고 이성봉 목사님을 통해서 너무나 깊은 은혜와 감동을 받은 일이었습니다. 그 때 이성봉 목사님이 몇 달에 한 번씩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저는 빠지지 않고 거의 매번 부흥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12번은 참석한 것 같았습니다. 그 때는 부흥회가 월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개학 때는 새벽과 저녁 집회만 참석했지만 방학 때는 오전 집회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은혜를 사모했기 때문에 제가 스스로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된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언제나 신앙생활이 첫째였고 공부는 둘째였습니다. 이성봉 목사님께서 새벽마다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셨고 오전과 저녁 집회 때는 은혜 사모와 성결과 헌신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천로역정 강의는 너무너무 재미있었고 은혜로웠습니다. 때때로 “세상 만사 살피니 참 헛 되구나...” 허사가를 부르시곤 했는데 이성봉 목사님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고 감동도 충만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앞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듣곤 했는데, 이성봉 목사님께서 성경 아무데를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면 저는 성경을 찾지도 않고 즉시 암송해서 읽곤 했습니다.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는 말씀들을 제가 거의 다 암송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했고 토요일 새벽에는 안수 기도를 받았습니다.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후에는 묻지도 않으시고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거지” 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12번은 안수 기도를 받은 것 같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었고 축복된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삶과 은혜를 사모하는 삶이 너무너무 귀중한 것을 배우게 되었고 그래서 평생 회개를 힘쓰면서 살게 되었고 은혜를 사모하면서 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 번은 대구 어느 교회에서 미국에서 온 잘비스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한경직 목사님이 통역을 하셨습니다. 저는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은혜를 받고 있었는데 잘비스 목사님이 회개는 혼자서 조용히 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앞으로 나와서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아무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먼저 일어나서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을 통해서 회개의 중요성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무슨 죄를 고백하며 회개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진지하게 회개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선생님들의 말씀과 목사님들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들음과 순종의 은혜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듣는 귀를 주신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귀중한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성봉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 더 한다. 후에 내가 서울로 돌아와서 종로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스피커에서 유행가 대신 이성봉 목사님의 허사가의 노래나 천로역정 강의가 흘러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다섯 번째로 “서울에서 지낸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의 추억들을 살펴봅니다. 저는 서울로 올라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을 보냈는데 창동교회(대창교회)에 다니면서 김치선 목사님 밑에서 보다 철저한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새벽기도와 은혜사모와 전도의 영적 유산을 계속해서 보물로 물려 받았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한국의 예레미야이셨고 회개운동과 기도운동과 부흥운동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저는 주일 아침과 저녁과 수요일 저녁은 물론 새벽기도회를 빠지지 않았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와 기도를 열심히 드렸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매일 새벽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게 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찬송을 부르시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셨고,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셨고 그리고 2만 8천 여 동내에 우물을 파게 헤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저는 그때 중구 회현동에서 살았는데 새벽기도를 마친 다음에는 남산에 올라가서 30여분 이상 더 성경을 보며 기도하고 집으로 내려와서는 아침 밥을 먹고 30여분 동안 걸어서 서울 고등학교를 다니곤 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는 어디든지 따라다녔는데 삼각산 관악산은 물론 대구 주암산 부흥회까지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주암산 부흥회 때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라는 찬송을 부르게 되었는데 “피 흘려 사신 교회” 라는 가사에 깊은 감동을 받고 너무 고마워서 울고 또 울었고 “늘 사랑합니다” 라는 가사에 늘 사랑하지 못하는 잘못을 뉘우치면서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옆의 사람이 “학생 무슨 슬픈 일이 있어?” 라고 물었지만 저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울었습니다. 주암산 부흥회에 함께 참석했던 김치선 목사님의 아들 세창군이 저보고 안수 기도를 해 달라고 해서 안수기도를 해준 일도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매년 년 초마다 3일씩 금식 기도를 했는데 저는 빠지지 않고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을 너무너무 존경하며 사랑했고 김치선 목사님의 사랑과 은혜를 너무 많이 쏟아 받았습니다. 한번은 김치선 목사님께서 관악산에 기도원을 짓는데 교인들이 모두 산 아래에서 큰 돌을 열 두 개씩 산 위로 메어 나르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귀찮게 생각하고 듣지 않았지만 저는 내 몫으로 큰 돌 열두 개를 나른 다음, 나의 어머니 몫으로 열두 개를 더 날랐고 그리고 나의 아버지 몫으로 열두 개를 더 날랐습니다. 물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고 김치선 목사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을 날랐습니다. 저에게 “들을 귀”와 “순종하는 마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무엇보다 회개를 강조하시면서 설교 시간에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시기도 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한 죄를 회개했고, 가정을 다스리는 파수꾼을 사명을 다하지 못한 죄를 회개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한 죄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사참배의 경력을 인정하며 그 죄의 용서를 구하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을 너무너무 좋아하고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영혼이 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매일 새벽마다 울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2만 8천 여 동네에 우물을 파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하셨습니다. 즉 2만 8천 여 동네마다 교회를 세우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무조건 왕십리로 달려갔습니다. 왕십리 들판에 우물을 파기 위해서였습니다. 토요일과 주일 왕십리 들판에 나가서 서울고등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찬송을 부르면서 아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양공고를 다니던 안흥규라는 학생을 만났는데 함께 전도하고 함께 예배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점점 많이 모여들어서 주일날 들판에서 예배 드리기가 불편했습니다. 근처에 있는 학교의 교실 서너 개를 빌려서 학생들과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고 3때는 공부에 전념하여야 하는데 저는 고 3때 전도와 목회에 전념했습니다. 저에게는 여전히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이 첫째였고 공부는 둘째였습니다. 그런데도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에 합격하여 역사를 전공하며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서울대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열심히 전도와 목회를 계속 했습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모이기 시작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막을 구해다가 천막을 치고 천막교회를 시작 했습니다. “한양제일교회” 라는 교회 간판을 달았습니다. 아이들 60여명과 어른들 40여명이 모였습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시작한 초라한 개척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젊은 엄마 교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한양제일 교회가 제일 좋아요.” 제가 주일 오후 대학생 교복을 입고 노방전도를 하는 것을 어떤 교인이 보고는 “천사가 전도하는 것 같아요” 라는 말도 했습니다. 저는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 모두가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사랑과 은혜와 감동과 도전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과 같은 눈물의 회개와 은혜 사모와 기도와 전도의 목사님을 저의 신앙의 스승님으로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에게 사모하는 마음과 듣는 귀와 순종할 수 있는 몸을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때 저와 같이 사역하던 안흥규 학생은 나중에 제가 강변교회를 개척해서 목회할 때 함께 사역을 했고 강변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 하나를 더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일 때 여름 어느 날 남대문 네 거리에 있는 기독교 서점에서 “사랑의 원자탄” 이란 책을 사서 들고 내가 새벽기도 후 날마다 올라가서 기도하곤 하던 남산 어느 숲 속으로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랑의 원자탄”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사람도 있을 수가 있는가? 나병에 걸려있는 아이들이 손양원 목사님과 함께 소풍을 가서 점심을 먹는데 손 목사님이 아이들의 점심을 좀 나누어먹자고 했지만 아이들은 자기들의 나병이 손 목사님에게 전염될 까봐 자기들의 점심을 자기들끼리만 먹고 손양원 목사님에게는 주려고 하지 않았는데 손양원 목사님이 억지로 아이들의 점심을 빼앗아 먹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으로 쏘아서 죽인 원수와 같은 사람을 자기의 양 아들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저는 충격과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후부터 손양원 목사님은 제가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고 닮고 싶은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여섯 번째로 “서울에서 지낸 대학생 시절”의 추억들을 살펴봅니다. 저는 고 3때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가서 좋은 목사님이 되려면 대학에 가서 무엇을 전공하면서 공부를 하면 좋겠냐고 여쭈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역사를 전공하면서 공부하면 좋다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본래 남의 말을 잘 듣는 터라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던 역사를 전공하기로 작정하고 서울 문리대 사학과에 지원을 했는데 합격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에서 서양사를 전공하면서 앞으로 신학 연구와 목회 사역을 하는데 필요한 “균형 잡힌” “양면적인” “포용적인” “관용적인” 사고의 틀과 안목을 조금은 마련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생 시절 좋은 신앙의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중요하고 보람된 일을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생 시절 손봉호 김상복 이형기 이명섭과 같은 좋은 신앙의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보람된 일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 4.19가 일어나던,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한 때에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를 가지고 문리대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진지하게 논의했습니다. 결론은 “새 생활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사회의 부조리한 실태를 조사한 뒤 문리대 소강당에서 그것을 발표했습니다. 소강당을 가득 메운 학생들에게 밀수입되는 커피와 양담배의 1년 분 금액이 대전시 전체 인구가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 값과 같다는 조사 내용을 발표하자 학생들이 흥분했습니다. 사회의 부조리도 지적 습니다. 서울대 문리대생 수백 명이 방학이 시작된 6월부터 한 달 동안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다방 공원 시장 극장 댄스 홀 요정 국회 등을 찾아 다니며 “새 생활운동”을 폈습니다. 서울 시내와 외곽 지역의 다방과 극장과 요정과 댄스 홀 등을 찾아 다니면서 커피와 양담배를 마시거나 피우지 말자고 호소했습니다. 매년 커피를 수입하는 비용이 대전 시민들이 일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식 값과 같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커피를 마시지 않겠다고 말했고 양담배를 건네 주면서 피지 않겠다고 응답했습니다. 산더미만큼 수거된 양담배를 광화문 네거리에 쌓아놓고 애국가를 부르며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미국 타임스 지에 보도되었습니다. 밤마다 댄스 홀을 찾아가 그곳에서 춤추는 고관들과 유부녀들을 향해 지금이 댄스 홀에서 춤을 출 때냐고 말하면서 춤추기를 자제할 것을 호소했는데 반응이 긍정적이었습니다. 미국 군인들이 있는 댄스 홀에서는 김상복 학생이 영어로 호소를 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4. 19 이후 국회의원들이 군용차를 빼내어 불법으로 “가” 넘버를 달고 다니던 차량 수십 여대를 국회 의사당 앞에서 탈취하여 시청 앞 광장에 집결시키고 불법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모두 불태우겠다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요정을 찾아가서 술을 마시며 즐기는 정치가들을 질책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새 생활운동”이 다소 과격한 양상을 띄기도 했지만 사회악과 부패를 제거하고 사고와 생활을 바꾸자는 우리들의 동기가 매우 순수했고 비정치적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수많은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고 심지어는 이 호 내무장관을 비롯한 고위 관리들까지 적극적으로 호응했습니다. 서울 시 경찰국장은 “새 생활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학생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새 생활운동”은 사회 변혁을 내 세웠지만 근본적으로는 윤리 운동이요 신앙 운동이었습니다. “새 생활 운동”이 전국의 모든 대학으로 확산되었고 나중에는 장 면 정부의 “신 생활 운동” 박정희 정부의 “새 마을 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하겠습니다. “새 생활운동”은 한 평생 우리들의 삶과 사역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손봉호 박사는 나중에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저도 신앙생활을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인 봉사의 삶과 연결시키면서 하는데 최선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젊었을 때 올바른 사회적인 봉사의 일을 하기 위해 시간과 열정을 한 번 쏟아 붇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만 잘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생 시절 군대 생활을 1년 반 동안 했는데 군대 생활을 “즐겁고” “재미있게” 했습니다. 지금은 물론 그 때도 일부 사람들은 군대에 가는 것을 싫어하며 피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평생 힘들고 어려운 일을 싫어하지도 피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어려운 일들을 모험적으로 뚫고 나아가는 것을 즐겼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 군에 입대하여 1년 6개월 동안 군 생활을 아주 “즐겁게” 했습니다. 논산훈련소에서 타잔처럼 줄을 붙잡고 멀리 공중으로 날아가는 훈련도 받았습니다. 무서워하면서 피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본래 타잔 영화를 즐기던 터라 줄을 붙잡고 공중으로 멀리 날아가는 훈련이 매우 재미가 있어서 한 번 타고 또 다시 와서 타곤 했습니다. M1 소총을 쏘는 훈련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저는 무척 재미가 있어서 한 번 쏘고 또 다시 와서 쏘곤 했습니다. 포복 훈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머리 위에서 총알이 날아가는데 엎드려서 포복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저는 스릴을 느끼면서 포복훈련을 받았습니다.


결국 저는 논산에서 훈련 받는 것도 그리고 7 사단에 가서 군 생활을 하는 것도 “즐겁고” “재미있게” 했습니다. 논산에서는 물론 7사단에서 군 생활을 할 때 저는 언제나 조그만 성경책을 앞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면서 자주 읽고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최선을 다해서 했습니다. 성경책을 읽으면서 줄을 치기도 했습니다. 요사이 성경책이 아닌 스마트 폰을 가지고 다니는 데 그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의 방식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풀밭에 잠시 들어 누어 쉴 때에도 앞 주머니 속에서 성경책을 꺼내어 읽곤 했습니다. 주일 예배 드리는데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군종 장교와 자주 만나서 교제하면서 아주 친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군법에 저촉되는 것이지만 조용히 합니다. 7 사단에서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사병들이 즐거워하는 시간 중의 하나는 저녁에 누군가가 부대 밖으로 나가서 동네 가게에서 과자와 빵을 사가지고 와서 함께 먹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병들은 저녁에 부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장교만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까이 지내던 군종 장교에게 다가가서 장교님 군복과 모자를 좀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 군종 장교는 저처럼 장난끼가 있는 장교여서 저에게 군복과 모자를 빌려주었습니다. 저는 장교의 군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부대 밖으로 나가서 맛있는 것들을 사 가지고 들어오곤 했습니다. 부대를 지키고 있는 사병들이 저에게 깍듯이 경례를 하면 저는 모자를 눌러 쓰고 점잖게 답례를 하곤 했습니다. 좀 지나친 “장난꾸러기” 행위였지만 아주 재미가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군 생활을 “즐겁고” “재미있게” 했습니다.





일곱 번째로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시절”의 추억들을 살펴봅니다. 저는 1961년 대학을 졸업한 후 총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교수진은 박형룡, 명신홍, 한철하, 최의원, 오병세, 강태국 교수님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저는 한철하 박사님으로부터 학문적 도전과 감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교회사를 사건 위주가 아닌 주제와 흐름 위주로 연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거스틴 연구” 강의 시간에는 어거스틴의 초기 작품들을 영문으로 읽으며 그의 신학 방법론과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들을 다루었는데 그 당시 저에게 많은 감동과 학문에 대한 정열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결국 저는 후에 어거스틴을 전공하며 석사 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총회신학교에서 세 학기 공부를 마치고 1962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훼이스 신학교로 유학 가서 신학수업을 계속했습니다. 돈 104불을 내고 미국 군함을 타고, 단돈 백 불을 가지고 미국으로 간 것이었습니다. 단돈 백 불을 가지고 미국에 가서 12년 동안 유학생활을 했는데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생활을 했습니다. 두 주 반 동안의 항해 후 샌프란시스코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즉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이틀 동안 밤낮으로 타고 가서 훼이스 신학교에 도착하자 마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교장 매크레이 박사님의 “교회사” 강의를 잘 듣고 공부를 잘 해서 칭찬을 받았고, 교내 인쇄소 책임자의 신임을 얻어서 제가 원하는 시간에 인쇄소에 가서 일하면서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도 했습니다. 매킨타이어 박사가 학교에 와서 자유주의를 신랄하게 공격하곤 했는데 저는 거부반응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나 훼이스 신학교에서의 유학생활은 부족함이 없는 즐거운 생활이었습니다. 이사 가는 부부 학생에게서 싼 값에 전축을 사다 놓고 고전 음악 레코드 판들을 사서 모으며 제가 즐기던 고전음악을 들으면서 행복한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1964년 훼이스 신학교를 졸업한 후(B.D. 취득)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반 동안 신학석사 과정에서 교회사를 전공했습니다. 석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신의 도성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역사이론” 이었는데 이는 후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발전했습니다. 저는 교회사를 전공하면서도 구약학 교수 에드워드 제이 영 박사님의 인격과 신앙과 학문에 깊은 감화를 받으며 그 분을 흠모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귀중한 것은 학문 자체라기보다는 학문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 잊지 못할 즐거운 일들 중의 하나는 그곳에서 함께 공부하던 손봉호, 김영익, 전연택 등 총각들이 주일 오후마다 결혼한 김의환, 한기범, 한의신 등 선배 목사님들의 가정을 주기적으로 차례로 방문하여 한국 음식을 마음껏 맛있게 얻어 먹은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모님들이 무척이나 고생들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총각들이 그런 사정도 모르고 당당하게 방문 시간표를 만들어 전하면서 그들 가정들을 찾아가서 음식을 얻어 먹곤 한 일이 고마우면서도 죄송하게 느껴집니다. 그 일을 주도한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저는 1966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신학석사 학위(Th. M.)을 얻으며 졸업한 후 뉴 헤이븐에 있는 예일대학교 신학원에 입학하여 또 다시 신학석사 과정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했는데. 한 해 동안의 수학은 매우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강의를 듣고 시험을 보는 식의 공부가 아니고 연구 논문을 써서 제출하는 리서치 위주의 공부였습니다. 역사신학 교수 자로슬라브 펠리칸 박사님의 강의는 명 강의 중의 명 강의였고 내가 만난 교수들 중의 교수요 학자들 중의 학자였습니다. 그 분은 또한 복음주의 정열을 가지고 설교하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한 해 동안 도서관에서 살 정도로 밤낮 책에 파묻혀 행복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펠리칸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쓴 석사학위 논문의 제목이 “교부들에 나타난 이사야서의 메시야적 해석” 이었습니다. 예일대학에서 수업하던 시절 교회사의 대가인 라토렛 교수님과 베인톤 교수님과 친분을 갖게 된 것은 저의 행운이었습니다. 두 분은 은퇴 교수로 계속 저술에 종사하며 캠퍼스에서 학생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12년 동안의 미국 유학생활 중 여름 방학에는 물론 학기 중간에도 틈틈이 일을 해서 돈을 벌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훼이스 신학교에서는 건물 청소, 식당 웨이터, 인쇄소 일, 건물 페인트 등을 했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시절에는 화장실 청소, 식당 웨이터, 화학 도금 공장 일, 정원 가꾸기, 주택 페인트, 브리타니카 백과사전 판매, 접시 닦기, 상점에서 판매 등을 했습니다. 예일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주로 학교 도서관 일을 했고, 아이오와에서 공부할 때는 동물병원에서 살면서 밤에 전화 받는 일과 함께 주택 페인트 하는 일도 종종 했습니다. 요사이는 한국 유학생들이 한국교회의 보조를 받으면서 공부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들이 일을 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일하면서 공부한 것이 아주 좋은 경험이 되었고 즐겁고 유익한 일이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어느 해 여름 나는 뉴욕 번화가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아주마 라는 선물 판매 상점에서 손봉호, 마루야마(후에 동경대학교 총장 역임) 친구들과 함께 판매원의 일을 했습니다. 각색 인종의 여자 손님들을 날마다 주로 대했는데 저는 그들 나라의 말로 인사하는 법, 대화하는 법, 설득하여 물건을 사게 만드는 법을 익혔습니다. 남미 여자에게는 스페인 말로, 독일 여자에게는 독일 말로, 프랑스 여자에게는 프랑스 말로, 유대인 여자에게는 히브리 말로, 그리스 여자에게는 희랍어로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면 이미 그들의 마음을 절반은 산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판매원의 판매 술에 넘어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본 상점에서 손봉호와 마루야마를 제치고 제가 물건들을 제일 잘 팔아서 주인의 신임을 얻기도 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일하던 일들 중 주택 페인트 하는 일과 정원 가꾸는 일이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일이었습니다. 뜨거운 태양 열 아래서 이층 또는 삼층 주택 벽의 낡은 부분들을 베껴 내고 보수한 후 그곳을 깨끗하게 페인트 하는 일과 넓은 정원의 풀을 깎고 흐트러진 화단을 깨끗하게 새로 단장하는 일은 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하다 말고 풀밭에 드러눕곤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즐거웠습니다. 낡은 집이 새 집으로, 흐트러진 정원이 단정한 정원으로 바꾸어지는 것을 바라 볼 때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때로는 지나가다가 허름한 집을 발견하고 집에 들어가서 주인에게 이 집을 페인트 하면 아주 멋진 집으로 바뀌어지는데 페인트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페인트 하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고 비싼 돈도 받지 않는다고 말하면 대부분 그렇게 하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모두 “즐겁고” “재미있게” 했습





여덟 번째로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시절”의 추억들을 조금 더 살펴봅니다. 저는 1967년 예일대학 신학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졸업할 때는 “에드워드 흄 휄로우십” 이라는 상을 받았는데 그 상금의 대부분을 총신대학에 “손양원 목사님 기념 장학금”으로 보냈고 일부를 한국의 어느 작은 교회에 후원금으로 보냈습니다. 몇몇 학교에 박사학위 과정에 입학원서를 제출했으나 대부분 거절 당했고 아이오와 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 입학이 허락되었습니다. 아이오와 대학에 입학은 허락되었지만 장학금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장학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저에게는 해당되기 어렵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한참 생각을 하다가 헌 자동차에 짐을 싸서 싣고 무조건 동부에서 중부 아이오와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종교학과 주임교수 포렐 교수님을 만나서 입학을 허락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장학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저에게 해당되기 어렵다는 편지를 받았지만 저에게 줄줄 믿고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라고 말했더니 나를 한참 응시하던 포렐 교수님이 “그러면 할 수 없이 그 장학금을 줄 수 밖에 없다” 라고 말해서 저는 그 장학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포렐 교수님은 동물병원에 내가 살 처소까지 마련해주었습니다. 저는 어떤 때는 이렇게 무작정 돌진해 나가므로 저의 일생을 헤쳐 나가곤 했습니다. 포렐 박사님은 저를 자기의 조교로 일하게 해 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이오와에 있는 동안 광활한 옥수수 밭과 연못들로 이어진 자연을 즐길 수 있었고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던 한인 학생 가정들과의 교제를 증진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오와 시에는 아이오와 대학에서 강의하는 한인 교수와 공부하는 한인 학생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30여명 있었는데 한인들 사이에 별다른 교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인들이 만나는 교제의 장들을 마련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운동회, 야유회, 회식 등을 마련했고 ”아이오와 소식지”를 만들어 한인들간의 교제를 증진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한인회”가 만들어 졌고 후에는 “한인교회”까지 만들어 졌습니다. 저는 외국 학생들과의 만 남과 교제를 증진하는 일도 도모했습니다. 저는 어느 사람의 소개로 시카고에서 일하고 있던 여성을 사귀게 되었는데 6개월 동안 매 주말마다 4시간 거리의 시카고로 드라이브를 하며 데이트에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6개월 동안의 데이트 후 저는 그녀와의 결혼에 꼴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대문 교회 김 모 장로님의 딸로 서울 음대를 졸업한 후 그 당시 시카고의 모 감리교 기관에서 사무직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봉화양은 내가 좋아하는 딸 같은 타입의 귀여운 숙녀였습니다. 저는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서 결혼 반지 하나 살 돈도 없었으나 아무 주저함이나 미안함도 없이 무작정 결혼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아이오와 대학의 콘세트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지만 재미가 있었습니다. 조그만 텃밭에 꽃도 토마토도 심었으며 주말마다 이곳 저곳 호수를 찾아 다니며 낚시도 함께 즐겼습니다. 결혼 일년 후 귀여운 딸 혜원이를 얻었습니다.


저는 아이오와 대학에 그대로 머물면서 아이오와 대학, 아퀴나스 신학원, 드뷰크 장로교 신학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공동 박사학위 프로그램”에 등록을 하고 리써치 위주의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교부신학 라틴신학 종교개혁과 카톨릭의 반응 현대교회론 어거스틴 연구 등의 강의를 들으며 학위논문 작성을 위한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교부신학 전공의 매고니글 교수는 젊은 교수였지만 옥스포드 대학 출신의 박식하고 유능한 교수로 내가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친절한 지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매고니글, 포렐, 드러먼드 교수 등의 지도를 받아 완성한 철학박사 학위 논문의 제목은 “두 도성에 대한 어거스틴의 교훈에 나타난 종말관의 기능”이었습니다. 학위논문에서 제가 취급한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종교적 욕구의 성취 가능성의 관점에서 본 현세에 있어서 인간 존재의 의미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사고의 “양면성”과 “포용성”은 저의 사고에 평생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1972년 12월 아퀴나스 신학원에서 철학박사(Ph. D.) 학위논문을 완성한 후 1973년 1월 예일대학으로 다시 와서 리써치 펠로우로 한 해를 지냈습니다. 긴장과 억압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마음으로 독서와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바로 그 때 뉴욕을 방문한 조동진 목사님이 저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한국교회 선교의 선구자인 조동진 목사님과의 만 남은 저의 연구와 사역의 방향에 획기적인 영향을 마쳤습니다. 조 목사님은 제가 유학을 마친 후 후암교회에 교육 목사로 오라는 말씀과 귀국하기 전에 풀러 신학교 선교신학원에 가서 선교학을 연구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저는 본래 남의 말을 쉽게 잘 듣는 터라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 해 연말 저의 생애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73년 11월 11일 저의 둘째 아이 철원이가 뇌수정이란 불치의 병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저는 1973년 12월 말 아내와 함께 3살 된 혜원이와 생후 1개월 된 철원이를 데리고 동부에서 자동차로 대륙을 횡단해서 서부 캘리포니아 파사데나 풀러 신학교로 향했습니다. 여행 도중 철원이의 병세가 악화되어 시속 140여 마일 속도로 30여 시간을 5분만 쉬고 계속해서 서부 사막지역을 달려서 로스안젤스 췰드런스 호스피탈에 도착했습니다. 입원을 시킨 후 우리는 풀러 신학교 기숙사에 여장을 풀고 1974년 1월부터 풀러 신학교에서의 연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생후 2개월 된 철원이가 뇌 수술을 하기 전 의사가 전해 주는 말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수술 후 철원이가 장애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철원이가 장애아가 된다면 내가 철원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저는 그렇다고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동안의 깊은 고민과 기도 끝에 저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철원이가 내 아들이란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저의 사고의 변화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저의 시각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본래 착하고 아름답고 신앙이 좋은 사람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당신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덜 착하고 덜 아름답고 신앙이 덜 좋은 사람들도 꼭 같이 사랑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때, “너는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을 차별하느냐?” 라는 준엄한 책망이 들려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손을 들고 항복했습니다. 그 후부터 저는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을 찾아가게 되었고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게도 되었습니다. 저는 1974년 1월부터 풀러 신학교 선교신학원에서 리써치 어쏘우시에이트로 8개월을 지내며 “선교학” 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풀러 선교신학원에서의 선교학 수업은 저의 학문연구와 사역 방향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신학과 사역을 선교적인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홉 번째로 “귀국 후 목회 사역을 하던 시절”의 추억들을 살펴봅니다. 12년 동안의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1974년 가을에 귀국한 후 후암교회에서 5년 동안 대학생과 청년들을 지도하며 교육목사로 목회한 일이 있었습니다. 목회 초년생이었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서 사역에 임했는데, 많은 젊은이들의 삶이 변화되었고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즉 선교의 길과 목회의 길로 가게 된 젊은이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안성원, 김동화, 박선규, 최성호, 이진, 양용태, 한옥희, 탁정희 등이 목사 또는 선교사로 헌신해서 지금까지 사역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후암교회 사역을 마치고 1978년 6월 22일부터 1979년 2월 18일까지 8개월 동안 영안교회에서 개척 목회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영안교회는 한 가족이 1억원에 달하는 돈을 투자하여 강남 신사동에 새로 건축한 교회였습니다. 누군가의 소개를 받아 그들이 저에게 전화를 걸고, 와서 개척목회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본래 남의 말을 잘 듣는 터라 가서 그 교회를 섬기기로 했습니다. 한 가족과 친척들 10여명이 모여서 시작한 교회였는데 8개월 후 교인이 100여명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영안교회에서 8개월 동안의 목회 사역을 마친 후 5, 6개월이 지난 다음, 영안교회에 다니던 몇몇 신자들의 요청으로 영안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광장동 워커힐에 있는 한도정 집사님 댁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후에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25동 505호로 옮겨서 성경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성경공부를 함께하던 사람들의 마음과 뜻이 모아져서 교회를 하나 시작하기로 하고 1979년 11월 4일 20여명의 신자들이 함께 모여 교회 설립 예배를 드렸습니다. 박윤선 목사님 부부도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몇 달 동안 현대아파트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80년 4월 6일 강남구 청담동 41-3 삼익상가 3층으로 이전하여 강변교회 입당예배를 드렸습니다. 입당예배 설교는 박윤선 목사님께서 하셨습니다. 저는 신학교 사역과 목회 사역을 하면서 박윤선 목사님의 지극한 사랑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1980년 4월 6일 강변교회를 시작하면서 강변교회의 표어를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서로 돌아보고 기쁨으로 섬기면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적 신앙생활을 힘쓴다”. “교제”와 “봉사”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서로 돌아보고”는 교제에 힘쓴다는 말이고 “기쁨으로 섬기면서”는 봉사에 힘쓴다는 말이었습니다. 교회 이름을 강변이라고 정한 것은, 강변에 세워졌던 빌립보 교회를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었고, 빌립보 교회가 “교제”와 “봉사”에 치중했고 “기쁨”이 넘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친밀한 “교제”와 사랑의 “봉사”가 부족한 교회는 부끄러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제”와 “봉사”를 힘쓰면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적 신앙생활을 힘쓰는 것을 교회의 표어로 삼고 28년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성도들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과 “봉사”의 손길을 펴는 데 주력하면서 목회했습니다. 저는 성도들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데 최선을 다했는데, 특히 새 신자들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어린이들과 아주 “친하게” 지냈습니다. 이웃의 동회와 구청과 학교와도 가깝게 지냈고 불우한 사람들이 사는 구룡 마을과도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들 모두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폈습니다. 저는 다시 목회를 시작한다 해도 여전히 같은 표어를 가지고 같은 방식으로 목회를 할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설교 위주도 아니고, 교육 위주도 아니고, 행사 위주도 아니고, 프로그램 위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성도들과의 친밀한 “교제”와 이웃들과의 친밀한 “교제”를 힘쓰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고, 성도들과 이웃들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봉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주력하여야 할 실천 목표 다섯 가지를 정했습니다. “예배가 생동하는 교회,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교회, 연합운동을 펴 나아가는 교회, 북한동포를 돕고 선교하는 교회, 청소년을 육성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 요사이 한국교회가 행사와 프로그램에 치중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난 잘못을 범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28년 동안의 강변교회의 목회를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그리고 성도들의 순수하고 적극적인 헌신과 협력과 사랑과 도움으로 너무너무 행복한 목회를 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강변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표하고 또 표합니다.


제가 강변교회에서 목회할 때 주력한 “교제”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 더 합니다. 저의 목회의 첫째 특징은 “교제” 였습니다. 성경은 물론 교회의 특징은 “교제”와 “소통”과 “편지”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성도들과의 “교제”를 힘썼는데, 특히 새 신자들과의 “교제”에 힘썼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친 다음 간단한 점심 식사를 한 후 저는 제 방에서 20여명의 새 신자들과 만나 한 시간 반 정도 친밀한 “대화”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또한 어린이들을 아주 많이 좋아했는데 어린이들도 저를 아주 많이 좋아했습니다. 저는 주일 아침마다 주일 학교 각 부서 즉 유아부, 유치부, 유년부,·초등부에 들어가곤 했는데 유아부 유치부 어린이들은 나에게 달려들어 안기고 업혔습니다. 유치부 어린이들 몇 명은 빙빙 돌려달라고 졸랐습니다. 이레는 아기 때부터 내가 안아주며 예뻐하던 아이였는데 내가 내 방에서 안아주면 내 품에 안겨서 한 시간도 두 시간도 편하게 잠을 자곤 했습니다. 성혜진은 아기 때부터 내가 예뻐하고 사랑하는 믿음과 생각이 깊은 어린이였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목사님, 제 꿈이 커졌어요. 목사님 요번 성탄절을 생각하면서 선물을 먼저 떠올렸지만 설교 말씀을 듣고 나서 깨달았어요. 예수님이 태어 나신 건 좋은 소식이지만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실 분이었기 때문에 슬펐어요. 그래서 요번 성탄절은 선물만 고집할게 아니라 회개하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고 싶어요. 목사님 추운 날씨에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목사님 뜻 깊은 성탄절 되세요♪” 사실 혜진이와 주고 받은 편지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어린이들과 새 신자들과 성도들과 여러 교회의 목회자들과 여러 지역의 선교사들과 그리고 이런 저런 사람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이 너무너무 많은데 요사이 세어보니까 일만여 개나 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교역자들과도 친밀하게 교제하며 이곳 저곳으로 자주 놀러 가곤 했습니다. 설악산을 비롯해서 거의 모든 산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동해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면서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행선지를 미리 알려주지 않고 서울을 떠나 태국의 좀티엔에 가서는, 모두들 놀라면서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강변교회의 목회는 즐거움이 넘치는 행복한 목회였습니다.





열 번째로 은퇴 후 “순회 목회 사역 시절”의 추억들을 살펴봅니다. 저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지난 2008년 1월 13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후 그 다음 주일부터 지난 11년 7개월 동안 매주일 전국의 작은 교회들 한두 곳을 주로 방문하며 “교제”하고 “설교”하는 “순회 목회 사역”을 하고 있는데 얼마나 보람되고 즐겁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평균 10여명 2, 30여명 또는 3, 40여명 내외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고 있는데 피차간 반가움과 즐거움과 은혜와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며 양 무리들을 정성껏 돌아보는 작은 교회 목회자들과 사모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는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만약 제가 강변교회에 계속해서 머물고 있었다면 저의 시야가 좀 넓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교파와 교단에 속한 다양한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교파 의식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개 교회 의식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고신이나 합동이나 합신 교단들만이 옳은 교단이란 생각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개척해서 목회하던 강변교회만이 제일 귀중한 교회라는 생각도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교단의 모든 교회들이 비록 아주 작은 교회들이라도 모두 예수님께서 피 흘려 사신 하나님의 귀중한 교회라는 사실을 점점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작은 교회들이 더 귀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들을 귀중하게 여기며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인 제가 작은 교회들을 방문할 때마다 그렇게도 좋아하고 고마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은혜를 받는 것을 발견하고 저는 놀라고 또 놀라곤 했습니다. 제가 작은 교회들을 방문할 때마다 교인들 수에 맞게 떡이나 빵과 초콜릿을 그리고 어린이들에게는 떡이나 빵과 초콜릿과 함께 스티커를 나누어주곤 하는데 모두들 너무 좋아합니다. 전주 부르심 교회에는 어른들 10여명 어린이들 10여명이 있는데 어느 해 제가 자동차를 타고 교회에 도착하니까 어린이 한 명이 “왔다. 왔다” 라고 소리를 지르니까 아이들이 나와서 저를 반갑게 맞았습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보낸 감사의 글 하나를 여기 옮깁니다. “목사님! 온 성도가 울면서 눈물로 드린 예배였습니다. 지난 번에도 그러했지만 오늘은 더욱 그랬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예배를 소홀히 여겼는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성도의 거룩한 교제를 무시하며 살아왔는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더불어 사랑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삶을 살았는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주님께서 기뻐하실 봉사에 게으르고 인색해 왔는지 가슴치며 회개했습니다. 큰 깨우침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맛난 떡과 초콜릿도 감사드립니다. 목사님께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받지 않으시니 더욱 송구할 따름입니다. 목사님의 귀한 사역에 큰 열매가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목사님의 귀한 말씀과 보살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2 10 29 김춘기와 전주 미래교회 교우 일동 드림.”


저는 가난한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자들을 귀중하게 여기시는 참으로 이상하신 분이라는 사실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교회들을 섬기는 사역자들이 귀중한 사역자들임을 발견하고 또 발견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크게 성장한 그래서 부족한 것이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보다는 환난과 궁핍 중에 있던 서머나 교회를 더 귀하게 보시며 칭찬하셨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세상의 유행에 따라서 크고 부요한 것을 너무 좋아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도시에서는 큰 교회들과 작은 교회들이 전쟁을 하는 것 같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크고 부요한 것을 칭찬하시는 대신 오히려 가난하고 궁핍한 것을 칭찬하시고 격려하셨는데 말입니다. 저는 주일마다 국내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지만 서너 달에 한번씩 선교지를 방문하며 선교사들과 현지인들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와 사랑을 전하며 나누곤 합니다.


제가 은퇴 후 작은 교회들을 돌아보는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독일의 한인교회 목회자들이 “독일에도 작은 교회들이 있으니 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2008년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독일 슐란트하임 산 속에서 모인 한인교회 연합수양회로 달려갔습니다. 5개의 작은 교회들로부터 100여명 이상의 신자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다섯 분의 목사님들과 다섯 분의 사모님들도 함께 모였습니다. 저는 3일 동안 1시간 30분 가량의 긴 설교를 다섯 번 했습니다. 감성보다 흥분보다 프로그램보다 음악보다 이적보다 체험보다 주님 닮으려고 하는 진실하고 소박한 삶이 가장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 삶은 버리는 삶이고 찾아가는 삶이고 항복하는 삶이고 사랑을 베푸는 삶이고 제물 되는 삶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프랜시스, 길선주, 이기풍, 주기철, 손양원, 장기려,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들이 그런 삶을 살았다고 지적했습니다. 말씀을 경청하는 참석자들의 마음 가짐이 순수하고 간절하고 눈물겹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집회 시간마다 젊은이들은 눈물과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금요일 저녁 세 번째 집회를 인도하며 세 번째 설교를 마쳤습니다. 제가 축도로 예배를 마치자 연합수양회의 준비위원장인 김익진 목사님이 나와서 간단한 광고를 했습니다. “혹 강사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몇 명이라도 좋으니 남아 주시오.” 몇 명이 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는 마이크를 붙잡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20명, 30명, 40명, 50명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받았습니다. 흐느끼며 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별 생각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자기들 형편에 꼭 맞는 기도를 해주었다고 고백했고, 어떤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삶에 대한 예언과 같은 기도들을 해 주어서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으면서 그 기도들을 가슴에 깊이 간직했다고 말했습니다. 안수기도는 결국 1시간 20여분 동안 계속되었다고 했습니다. 90여명의 신자들이 모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받았습니다. 수양회 동안 15명 정도의 어린 아이들과 아주 친하고 즐겁게 지냈는데, 몇몇 아이들은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스티커를 두 개씩 또는 세 개씩 받아 들고 좋아했습니다. 토요일 오후 마지막 다섯 번째 집회를 인도하며 마지막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 후 젊은이들이 떠나지 않고 줄을 서서 내가 안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젊은 여자 청년들도 남 집사님들도 독일 남성도 목사님들의 사모님들도 내가 안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섯 분 목사님들 중 한 분의 며느리는 나보고 좀 오래 꼭 안아 달라고 두 번이나 나에게 졸랐습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을 귀중하게 사랑스럽게 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너무너무 큰 것을 고백하고 또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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