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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08]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 (고전 15:10) - 포항 아름다운 고백교회


귀중한 교도소 사역을 하고 있는 이기학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는 포항 아름다운 고백교회에 제가 2014년 6월 22일 주일 처음으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신앙생활의 기본 도리”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5년 6월 7일 주일 여기 두 번째로 와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7년 8월 13일 주일 여기 세 번째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이기풍 목사님과 죄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2018년 7월 8일 주일 여기 네 번째로 와서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이기학 목사님이 오늘 저의 삶에 대한 간증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족한 죄인이 여기 포항 아름다운 고백교회에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 라는 제목으로 간증 설교를 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리고 이기학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저는 광야교회의 임명희 목사님과 샘물 호스피스의 원주희 목사님과 교도소 사역자 이기학 목사님을 위해서 매일 기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석 달 전에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 라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그 글이 지난 4월 6일 뉴스파워에 실린 일이 있습니다. 저의 한 평생의 삶을 열 가지로 나누어서 서술한 글인데 그 중에서 오늘 네 가지만 줄여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죄와 허물밖에 없는 죄인중의 괴수이지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너무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저는 한평생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삶을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게 살아오고 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저의 한 평생에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의 손길을 더듬어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신의주에서 지낸 저의 유아 및 유년 시절”의 추억들을 살펴봅니다. 저는 유아 및 유년 시절에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살았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으로 1938년부터 신의주 제이교회의 부목사님으로 나중에는 담임 목사님으로 9년 동안 목회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1살 때부터 9살 때까지 신의주에서 살게 되었는데 아기 때부터 한 평생 한경직 목사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은 것은 너무나 큰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장난꾸러기였습니다. 신의주에서 살던 유아 및 유년 시절 동네 친구들을 이곳 저곳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심한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중국 사람들이 가꾸던 토마토 밭에 들어가서 몰래 토마토를 따서 먹으면서 좋아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길가에 조그만 웅덩이를 파고 웅덩이를 종이와 흙으로 덮은 다음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웅덩이에 빠지는 것을 보고는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동네 친구들을 데리고 교회당(신의주 제이교회) 지붕 위와 교회당 맨 꼭대기에 올라가서 놀다가 누가 대변이 마렵다고 하면 저는 대변을 종이에 담아서 멀리 던져 남의 집 지붕 위에 떨어지게 하는 못된 장난까지 쳤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잔 소리나 야단을 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심한 장난꾸러기였는데 심한 장난꾸러기의 기질도 은혜를 받으면 두려움 없이 막 뚫고 나아가는 모험적인 신앙의 기질로 승화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후에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심한 장난을 치면서도 신앙생활은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유치부 시절 어느 성탄절에 교회에서 알타반 박사에 대한 성극을 공연하는 것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는데 그때 받은 감동을 평생 지니게 되었습니다. 유치부 어린이 시절 제가 들은 “알타반아! 알타반아!” 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결국 목회자가 된 후에도 저는 알타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교회에서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신의주에 있을 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일제 시대와 공산주의 시대에 자주 감옥에 투옥되어 감옥 생활을 하셨는데 신의주에 있을 때 저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갇혀 있던 감옥을 자주 찾아가서 감옥 담장 밖에서 목청을 돋아서 노래를 부르며 “아버지이! 아버지이!” 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그때 제가 자주 부르던 노래는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라는 노래였습니다. 저는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보고 싶어하면서 그때부터 예수님을 잘 믿기 위해서는 감옥에도 가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며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저에게 잔소리는 고사하고 타이르는 말씀도 별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저를 칭찬해 주시며 격려하신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의주와 평양에서 저의 아버지의 목회의 삶과 감옥의 삶을 바라보면서 새벽기도와 주일성수와 순교신앙의 유산을 내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체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아버지는 잔 소리를 하신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모든 것을 제가 스스로 하도록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자발적으로 또는 창의적으로 무엇을 하곤 했습니다. 결국 저는 공부도 잘 했고 놀기도 잘 했고 글도 잘 썼는데 글을 잘 쓴다고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부족한 저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아 너무나 컸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에게 물려주신 믿음과 사랑의 유산이 너무나 귀중했습니다.





둘째로 “평양에서 지낸 저의 소년 시절”의 추억들을 살펴봅니다. 제가 10살 즉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47년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이사 왔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신의주 제이 교회를 사임하시고 평양 서문밖 교회로 부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공산주의 정부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강량욱 목사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평양 감옥에서 감옥생활을 하시다가 나중에는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탄광에 투옥되어 중노동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끔 아버지를 면회하러 어머니와 함께 사동탄광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남루한 죄수 복을 입으신 아버지를 몇 번 만나 뵈온 기억이 납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 신앙적인 감화를 은은하게 받았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감옥에 가는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는 교훈을 말이 아닌 삶으로 전수받았습니다. 제가 평양 제5인민학교를 다닐 때 벌을 서고 정학을 당하면서도 주일성수를 끝까지 고수했던 이유도 바로 아버지로부터 받은 신앙적인 감화와 교훈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더욱 더 열심히 했습니다. 평양은 바로 주기철 목사님과 최봉석 목사님께서 1944년 4월 21일과 25일에 순교하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에게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신앙의 씨앗을 심어주신 분들이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이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선생님들의 말씀을 잘 들었는데 선생님들이 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했습니다. 교회에 와서 유리창을 닦으며 청소를 하라고 하면 청소를 했고, 새벽 기도를 하라고 하면 새벽 기도를 했고, 주일날 공부를 하지 말고 물건이나 음식을 사지 말라고 하면 공부도 하지 않고 물건이나 음식도 사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들을 수 있는 귀와 순종할 수 있는 마음과 몸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양 제 오 인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일요일 날 학교에 등교하라는 명령을 매주 받았지만 2년 동안 일요일 날 학교에 등교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섰고 때로는 정학을 받았지만 주일날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학교 오후 예배 시간에 누구든지 기도하라고 하면 제일 먼저 제가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주일 저녁 어른 예배시간에 때때로 제가 나가서 “간증” 또는 “발표”를 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저를 가장 많이 사랑했지만 평양에서도 저에게 잔소리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공부를 잘 하라고 또는 신앙생활을 잘 하라고 타이르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저는 평양에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저는 저를 믿고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신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깊은 사랑과 존경을 표합니다. 잔소리보다는 순수한 사랑과 격려가 그 무엇보다 귀하다는 것을 저는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잔소리를 많이 듣고 자란 어린이들은 자발성이나 창의성보다는 짜증과 불쾌감을 지니고 소극적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바로 드리면서 살기 위해 11살 때인 1948년 8월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북에 남겨 두고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는데 제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저를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로 이루어진 것을 저는 잘 압니다. 제가 평양을 떠나기 전에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가서 주일을 바로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저를 한 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를 너무 사랑하시면서 저 없이는 못 살겠다고 늘 말씀하시던 어머니도 울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저의 모험적인 기질을 잘 아시는 어머니가 제가 떠나기 전 저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 위험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를 믿고 저를 멀리 떠나 보내시는 슬픔과 아픔을 지니신 부모님께 저는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평양을 떠나 기차를 타고 해주로 오면서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지니면서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좋은 목사님이 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미지의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면서 저의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습니다. 해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 날 밤 어른들 5,6명과 함께 38선을 넘게 되었습니다. 안내원을 따라서 조용 조용히 국경을 넘다가 우리 일행은 국경경비 군인들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모두 손을 들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 수가 없었습니다. 국경을 넘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혼자서 남쪽을 향해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언덕을 넘고 긴 파 밭을 달리고 목에 차는 강을 건너면서 계속해서 달렸습니다. 저는 조금도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약간의 스릴까지 느꼈습니다. 아마 3,40분 동안 달린 후 저는 남 조선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11살 때 혼자서 38선을 넘은 사건은 그후 저의 평생의 삶의 성격과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움 없이” “모험적으로” “막 뚫고 나아가는” 삶이 저의 삶의 모습이 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남쪽에 와서 어느 작은 초가집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젊은이가 저에게 다가와서 어디 가냐고 물었습니다. 서울로 간다고 했더니 어떻게 가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같이 오던 어른들이 모두 잡혀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저를 서울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청년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왔습니다. 서울 역에 도착했을 때 저는 화려한 모습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청년의 친절한 안내로 서울 중구 을지로 3가 7번지까지 무사히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수년 전부터 서울에 와서 사시던 이모님 집이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이모님을 반갑게 만나게 되었고 이모님 집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서울에서의 나그네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후에 나를 서울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준 그 청년을 찾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애를 썼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청년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천사”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저의 길을 선한 길로 인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랜 후에 저의 한 평생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을 선한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생각과 인도하심을 묵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다윗의 고백을 너무너무 좋아하게 되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시 139:17).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셋째로 “서울에서 지낸 저의 소년 시절”의 추억들을 살펴봅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살면서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지만 처음 2년 동안 저는 밤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주일을 성수하면서 마음껏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았고 너무 감사했습니다. 주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영락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고 주중에도 모든 예배에 참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주일성수는 계속해서 철저하게 했습니다.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너무 반가웠는데 한경직 목사님은 평생 부족한 저를 사랑으로 품어주신 귀한 스승이셨습니다.  


저는 서울에 와서 방산국민학교 5학년에 입학하여 2년 동안 공부했는데 저는 공부도 잘했고 운동도 잘해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고향을 떠난 고아와 나그네로 외로움을 지니고 살았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당당하게 명랑하게 적극적으로 살았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학교의 친구들은 제가 부모가 없는 고아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훌륭한 부모가 있는 학생처럼 당당하게 행동했습니다. 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제가 이북 사투리를 한다고 반 친구들의 놀림을 당한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 어떤 친구가 저를 계속해서 놀려서 제가 그 친구에게 학교 뒷마당에 가서 싸움을 하자고 했습니다. 결국 반 친구들이 학교 뒷마당에 모두 모였습니다. 반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그 친구를 때려눕혔습니다. 제가 이겼습니다. 그 후부터 그 친구는 저를 놀리지 않았고 반 친구들은 저를 더욱더 부러워했습니다. 운동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고 공부도 내가 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반에서 두 명씩 뽑아서 남산에 가서 과학 경연대회를 한 일이 있었는데 제가 뽑혀서 간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있어서 평생 신앙생활이 첫째이고 공부는 둘째였는데 저는 공부도 잘 해서 그 당시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던 서울중학교에 어렵지 않게 합격했습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엉뚱한 일을 하나 한 일이 있었습니다. 중구청에 가서 주민등록을 하는데 구청 직원이 저보고 “본”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본”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떨결에 내 “본”이 “남양”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평양에 있을 때 남양 군도에 살던 토인들이 등장하는 만화를 아주 좋아했는데 갑자기 남양군도가 생각나서 나의 본이 “남양” 이라고 대답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 본은 “김해”인데 저는 평생 “남양” 김씨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합동신학대학에서 “은퇴 기념논총”을 나에게 증정할 때 “남양 김명혁 목사 은퇴 기념논총” 이라는 제목을 사용했습니다. 제 딸은 “남양” 김씨 가문이 자기 대에서 끊어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무엇이나 주저주저 하는 대신에 얼떨결에 이리로 저리로 막 달려가곤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서울중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도 잘 했고 엉뚱한 짓도 잘 했습니다. 어느 날 교실에서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두 손을 망원경처럼 둥글게 만들어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국어 선생님이 나를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은진 미륵같이 생긴 놈이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나를 책망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들의 말씀을 잘 들었고 특히 김원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었는데, 일찍 일어나서 깨끗하게 부지런하게 책임 지키며 살라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려고 평생 노력을 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저의 평생의 삶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깨끗하게 부지런하게 책임 지키며 사는 것이 저의 삶의 철학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김원규 교장 선생님이 초청해서 말씀을 전하게 하신 변영태 교수님(후에 총리)의 말씀을 들었는데 변영태 교수님은 절약하면서 검소하게 살고 운동을 하면서 건강하게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치약도 절약해서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본래 다른 사람들의 말을 너무 잘 듣는 터라 그렇게 살려고 평생 힘썼는데 저는 평생 절약하면서 검소하게 살게 되었고 지금도 양치할 때 치약을 절약해서 조금씩 사용하곤 합니다.


저는 최근에 저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처럼 절약하면서 검소하고 소박하게 사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릇 씻은 물도 버리지 않고 화분에 주는 물로 사용하고, 음식을 남기지 않고 다 먹고 먹다 남은 음식을 버리지 않고 냉장고에 두었다가 다시 먹고, 오래 입은 낡은 옷도 버리지 않고 오랫동안 입고, 18년 동안 타고 다니는 아반떼 자동차가 38만 km나 달렸는데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운전하며 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10년 동안 전국을 운전하면서 다니는데 3분의 1 이상은 뉴트럴 즉 중립으로 다니면서 휘발유도 절약하고 자동차의 엔진도 쉬게 하고 공해도 줄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청주 양성교회에 다녀왔는데 가는 일이 113km인데 60km를 달릴 수 있는 적은 분량의 휘발유를 사용했습니다. 저는 외국 곳곳으로 여행하며 호텔에 묵을 때 며칠 동안은 침대의 이불을 갈지도 말고 청소도 하지 말라는 “청소를 하지 마시오” 라는 푯말을 문밖에 붙여놓곤 합니다. 저는 국내는 물론 외국의 산이나 해변을 거닐 때 항상 커다란 봉투를 가지고 다니면서 쓰레기를 가득 담아서 가지고 와서 쓰레기통에 버리곤 합니다. 저는 평생 절약하면서 검소하게 깨끗하게 살고 있는데 일회용 면도기를 20번 이상 사용하고 있습니다





넸째로 “대구에서 지낸 나의 소년 시절”의 추억들을 살펴봅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월남한지 2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인민군들이 탱크를 타고 서울 시내를 지나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미국 비행기 B 29가 하늘을 나르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고 B 29의 폭격도 눈 앞에서 목격했습니다. 제가 들어갈 수도 있었던 방공호가 폭격으로 인해 무너진 것을 눈으로 목격하기도 했고 폭격으로 인해 사람들이 길가에 쓸어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전쟁의 불행과 전쟁의 비극을 직접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6.25 전쟁으로 인해 서울을 떠나 피난민 대열에 끼어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모부님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 사장님의 봉고차를 함께 타고 사장님 가족과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부산까지 내려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만원이 된 기차를 겨우 타고 또는 걷기도 하며 힘들게 피난을 가는데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편하게 갔으니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부산까지 내려가는 길에서도 폭탄이 터지고 길가에 쓸어지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전쟁은 불행한 것이고 비극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부산까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부산에서 몇 달 동안 피난 생활을 하다가 우리는 대구로 옮겨와서 3년 동안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구에서 셋방 하나를 얻고 한 방에서 불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모님이 시장에 나가서 옷감 장사를 하며 돈을 잘 벌어서 차츰 어려움이 없는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3년 동안 피난 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새벽기도는 거의 빠지지 않았고 주일날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정성껏 드렸고 봉사와 전도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셋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새벽마다 대문을 열고 잠그지도 않고 교회로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서 대문을 잠그는 방법을 알아내었습니다. 결국 저는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새벽마다 대문을 열고 나가서 밖에서 대문을 잠그고 교회에 가서 마음껏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언제나 신앙생활이 첫째였고 공부는 둘째였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처음에는 대구제일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 때 어린이 사역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안성진 목사님이 어린이 사역을 담당하시고 어린이 사역에 관한 모임도 주관하셨는데 저는 그 때부터 안성진 목사님을 평생 사랑하며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구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여러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 때 대구에는 SB(Sister/Brother) 즉 누나와 동생을 맺는 것이 유행했는데 대구제일교회에 다니던 누나뻘 되는 주명숙이라는 고등학생이 나하고 누나와 동생을 하자고 했습니다. 저를 귀엽게 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주명숙 누나는 그 때 제가 다니던 영남중학교 교장인 주덕근 교장 선생님의 딸이었습니다. 저는 누나와 친하게 지냈는데 누나는 저를 누나 집에 데려가서 음식도 해 주고 선물도 주고 제 손수건도 빨아주었습니다. 저는 그 때 사과 껍질을 깎는 법을 누나에게서 배웠습니다. 즉 칼로 사과를 톡 친 다음 껍질을 깎는 법을 배웠는데 저는 지금도 그렇게 사과 껍질을 깎곤 합니다.  


제가 대구에서 잊지 못할 귀중한 추억은 한국의 무디라고 불리던 이성봉 목사님을 만난 일이었고 이성봉 목사님을 통해서 너무나 깊은 은혜와 감동을 받은 일이었습니다. 그 때 이성봉 목사님이 몇 달에 한 번씩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저는 빠지지 않고 거의 매번 부흥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12번은 참석한 것 같았습니다. 그 때는 부흥회가 월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개학 때는 새벽과 저녁 집회만 참석했지만 방학 때는 오전 집회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은혜를 사모했기 때문에 제가 스스로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된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언제나 신앙생활이 첫째였고 공부는 둘째였습니다. 이성봉 목사님께서 새벽마다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셨고 오전과 저녁 집회 때는 은혜 사모와 성결과 헌신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천로역정 강의는 너무너무 재미있었고 은혜로웠습니다. 때때로 “세상 만사 살피니 참 헛 되구나...” 허사가를 부르시곤 했는데 이성봉 목사님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고 감동도 충만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앞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듣곤 했는데, 이성봉 목사님께서 성경 아무데를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면 저는 성경을 찾지도 않고 즉시 암송해서 읽곤 했습니다.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는 말씀들을 제가 거의 다 암송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했고 토요일 새벽에는 안수 기도를 받았습니다.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후에는 묻지도 않으시고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거지” 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12번은 안수 기도를 받은 것 같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었고 축복된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삶이 너무너무 귀중한 것을 배우게 되었고 그래서 평생 회개를 힘쓰면서 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 번은 대구 어느 교회에서 미국에서 온 잘비스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셨는데 한경직 목사님이 통역을 하셨습니다. 저는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은혜를 받고 있었는데 잘비스 목사님이 회개는 혼자서 조용히 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앞으로 나와서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아무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먼저 일어나서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을 통해서 회개의 중요성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무슨 죄를 고백하며 회개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진지하게 회개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선생님들의 말씀과 목사님들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들음과 순종의 은혜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듣는 귀를 주신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귀중한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성봉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 더 한다. 후에 내가 서울로 돌아와서 종로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스피커에서 유행가 대신 이성봉 목사님의 허사가의 노래나 천로역정 강의가 흘러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으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열 가지 이야기들 중에서 네 가지 이야기들만 했습니다. 후에 기회가 되면 다시 와서 나머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의 말씀을 다시 읽고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제가 매일 읽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한 절에 “은혜”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사는 것도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우리들이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사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 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405장)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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