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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13] 전도와 섬김의 삶과 사역 (막 1:38,39, 10:45) - 안산 예수마을선교교회


제가 강변교회에서 2008년 1월 13일 주일 은퇴한 다음 지난 10년 4개월 동안 매 주일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2015년 2월 22일 주일 여기 처음으로 와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인생”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5년 7월 12일 주일 여기 두 번째로 와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6년 4월 24일 주일 여기 세 번째로 와서 “아가페의 사랑과 에로스의 사랑”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7년 1월 15일 주일 여기 네 번째로 와서 “하나님의 일꾼”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7년 9월 17일 주일 여기 다섯 번째로 와서 “죽도록 충성한 신앙의 선배님들”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2018년 5월 13일 주일 여기 여섯 번째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설교를 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오학봉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학봉 목사님이 오늘 “전도” 에 대한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오늘 “전도와 섬김의 삶과 사역”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므로 죄를 사하시는 대속과 구원의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고 죽음에서 부활하시므로 영생의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 9: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아보는 “섬김”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막 1:38,39).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에 있었지만 동시에 “전도”와 “섬김”의 손길을 펴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전도”의 사역을 수행하는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예수님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 “섬김”의 사역을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전도”와 “섬김”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참된 “전도”는 따뜻한 “섬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섬김”이 없는 말로만 하는 “전도”는 참된 “전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와 “섬김”의 사역을 동시에 하셨습니다. 참된 “전도”는 “섬김”의 삶 즉 따뜻하고 착한 삶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 1983년 7월 12일부터 10일 동안 화란 암스텔담에서 “국제 전도대회”가 개최되었었는데 빌리 그래함 박사님은 “전도는 기술이 아니라 삶이다” 라고 지적했습니다. “전도”는 기술이나 훈련보다는 변화된 사람의 “삶” 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빌리 그래함 박사님은 전도자가 전도자로서의 성결한 착한 삶을 잃으면 전도자로서의 삶은 끝장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그 때 너무나 큰 감동과 은혜를 받아 마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또 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성경에 나타난 “전도”의 비결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전도”는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변화된 사람들의 “섬김”의 삶 즉 따뜻하고 착한 “삶”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전도”는 말이나 기술이나 훈련으로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변화된 사람들의 “섬김”의 삶 즉 따뜻하고 착한 “삶”과 “간증”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과 교회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 존재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신자들과 교회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요 등대인데 소금과 빛과 등대가 하는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섬김”의 삶 즉 따뜻하고 착한 “삶”을 나타내 보이므로 올바른 삶을 살도록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인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이 두루 다니시면서 “섬김”의 일 즉 따뜻하고 착한 일을 하셨다고 베드로가 지적했습니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10:38).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전도”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요 4장에 기록된 사마리아 수가성 여자를 “전도”하신 예수님의 따뜻한 “삶”의 모습과 수가서 여자가 전도하게 된 “전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에 세상을 등지고 불행하게 살아가던 부도덕한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지 않는 정오 시간에 우물가에 와서 물을 길어가곤 하던 외로운 서글픈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의 삶과 운명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여자가 우물가에 오는 정오 시간에 맞추어 그 여자와 비슷한 피곤한 그리고 목 마른 모습으로 우물가에 와서 앉아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전도”의 모습이고 “전도”의 방식이었습니다.
       찾아가서 기다리는 온유와 겸손과 따뜻함과 착함의 모습이 예수님의 “전도”의 모습이고 “전도”의 방식이었습니다. 결국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가로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건네며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4:7). 절망과 불행에 빠져있는 사람은 사람들과 말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걸으셨습니다. 그 것이 예수님의 “전도”의 모습이고 “전도”의 방식이었습니다. “전도”는 찾아가는 것이고 말을 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을 좀 달라” 라고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매우 퉁명스러웠습니다. 불만과 원망이 가득한 투로 대답을 했습니다. “별 사람 다 봤네. 점잖게 생긴 유대 양반이 개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다 달라고 하시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거만한 태도에 개의치 않으시고 친절하게 대화를 시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누구이심을 가리켜 보여주셨습니다. “여자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이 얼마나 귀한 지를 알았더라면, 그리고 여자와 말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당신이 나에게 생수를 달라고 요청했을 것이요. 그러면 내가 여자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요." 그 여자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을 알아차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생수” 라는 말에 약간의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 여자는 여전히 따지는 투로 말을 했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누구 시길래, 나에게 생수를 주실 수가 있다는 말이요? 당신이 이 우물을 판 야곱 보다 더 큰 사람이란 말이요?” 마음 한 구석에 약간의 관심을 가지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서 반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부를 당하시면서도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전도”의 비결이 인내와 온유와 겸손과 따뜻함과 착함인 것을 발견합니다. “이 우물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 말을 들은 수가성 여자는 무엇인가를 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주님, 이런 물을 내게 주시옵소서.” 그 여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가리켜 “주님”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달라고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이런 물을 내게 주시옵소서.” 수가성 여자는 이제 할 말을 제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가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셨고 예수님에게 무엇인가를 구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 여자는 생각하지 않았던 말씀에 너무나 당황하고 놀랐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숨겨 오던 사실을 그대로 지적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가 성 여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실 직고 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여자의 마음을 몽땅 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 네 말이 참되도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부도덕한 그 여자를 옳다고 인정하시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전도”의 모습이고 “전도”의 방식이었습니다. 수가 성 여자는 주님 앞에서 완전히 항복했습니다. 수가 성 여자는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주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런데 주님, 메시야가 곧 오신다고 했는데 메시야가 언제쯤 오시게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이야말로 자기가 메시야임을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할 때 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내가 바로 메시야니라.” 예수님께서는 수가 성 여자로 하여금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전도”가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수가 성 여자는 이제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죄를 사하시고 생명의 물을 부어 주시는 메시야를 만나고 믿게 되었습니다. “전도”는 예수님을 만나게 하고 믿게 하는 것인데 온유와 겸손과 따뜻함과 착함과 “섬김”의 모습으로 다가가서 주님을 만나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 여자의 몸과 가슴과 영혼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자기 몸과 영혼에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의 강물이 온 몸에 출렁거림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평안과 감사가 넘쳐 흘렀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새로운 존재로 바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운명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전도”의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수가성 여자가 수가성으로 달려가서 “전도”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전도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도의 기술을 습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한 것뿐이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서 대화하는 가운데 그 여자의 운명이 변화된 것이었습니다. “운명의 변화”가 수가성 여인으로 하여금 달려가서 “전도”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영혼과 삶의 변화가 없는 전도는 형식적인 전도에 그칠 수가 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요4:28-29). 수가성 여자의 “삶의 변화”와 “운명의 변화”는 “간증”과 “전도”로 이어졌습니다. 자기를 싫어하던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메시야를 만난 사마리아 여자는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만나기 싫어하던 수가성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입을 열어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자기의 부끄러운 삶을 있는 그대로 들어내어 보여주시고 그리고 자기에게 생수를 부어 주신 주님을 큰 소리로 증거했습니다. “나를 좀 보시요. 나는 메시야를 만났소. 그 분은 나를 변화시켜 주셨소. 내 마음에 기쁨의 강물이 넘칩니다. 여러분들도 메시야를 만나 보십시요.” 생수는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흘러 넘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수가성 사람들이 수가성을 떠나서 예수님에게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 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 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요4:39-42). 수가성 여자의 “삶의 변화”와 “순수한 간증”이 너무너무 놀라운 “전도”의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전도”는 기술이나 훈련보다는 주님을 만난 사람의 “회개”와 “변화된 삶”과 “간증”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참된 “전도”는 온유와 겸손과 따뜻함과 “섬김”의 모습으로 이루어집니다.



둘째로, 욥바에 살던 도르가의 “전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행 9:42은 욥바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행9:42). 그리고 그 배경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그 배경 이야기란 도르가란 여인이 욥바에 살던 불쌍한 사람들에게 “섬김”의 일 즉 “착한 일”을 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9:36). 도르가는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고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전도의 기술을 습득한 것도 아니었고 전도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도르가의 “전도”의 비결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것뿐이었습니다. 도르가가 병들어 죽었을 때 욥바 사람들이 룻다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오게 했고 도르가의 도움을 받았던 과부들은 모두 함께 모여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행9:37—39). 감동을 받은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행 9:40-42).

도르가의 이야기의 중요한 결론은 온 욥바 사람들이 많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욥바에서 이루어진 “전도”의 비결도 도르가의 “섬김”의 일 즉 “착한 일” 이었습니다. 도르가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도 중요하지만 사도행전 9장이 강조해서 지적하는 것은 도르가가 과부들에게 속옷과 겉옷을 지어주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전도”가 힘있게 이루어졌고 욥바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어느 교회든지 전도를 많이 하고 성장을 많이 하기 위해서는 “선행과 구제와 봉사”가 많아야 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동네의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면서 청소를 할 수도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격려의 손길을 펼 수도 있습니다. 나팔 부는 선행과 구제와 봉사가 아닌 도르가처럼 조용히 하는 선행과 구제와 봉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도는 기술이나 훈련보다는 변화된 사람의 “착한” 삶과 “섬김”의 삶입니다. “전도”는 “변화된 사람”의 “삶의 모습”과 “사랑과 구제와 봉사”의 손길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셋째로, 안디옥에서 이루어진 “전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안디옥에 복음이 전파되고 전도가 힘있게 이루어진 근본적인 배경에는 스데반 집사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삶”과 “순교의 죽음”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11:19-21). “순교 신앙”이 안디옥교회 “전도”의 뿌리요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착한” 사람 바나바에 의해서 안디옥에 “전도”의 열매가 크게 맺게 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11:24). 바나바의 “착함” 때문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라고 지적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전도는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드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순교”의 죽음에 바탕을 둔 그리고 “착함”의 손길을 펴는 방식이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협력” 목회도 안디옥교회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비결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안디옥교회가 흉년을 당한 예루살렘교회를 향해서 “구제”와 “착함”의 손길을 편 일도 계속해서 부흥 발전한 비결 중의 하나였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11:29,30). 안디옥교회는 결국 가장 중요한 이방 선교의 기지가 되었고 이방 선교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전도와 부흥”의 비결은 결국 “착함”과 “섬김”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끝으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의 “전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목회와 전도의 방식과 비결”은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믿음은 나환자 “사랑”과 원수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한번은 박옥선이란 여 환자가 발 밑에 난 종기 때문에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악취 나는 환부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 주었습니다. 나병의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나환자들에게 모든 “사랑”과 “정성”을 다 쏟아 부은 한국의 프랜시스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렇게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 더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주보다는 더 사랑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그의 “사랑”의 극치는 1948년 10월 여수 순천 반란사건 때 나타나 보였습니다. 자기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충만하던 두 아들 동인군과 동신군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교회당에 들어가서 밤을 새워 통곡하고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 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결국 손양원 목사님의 마음에는 커다란 “사랑”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결국 원수 같은 안재선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게 되었고 그를 자기의 양 아들로 삼았습니다. “전도”의 폭탄이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랑의 원자탄”에 맞아서 죄 사함과 구원의 놀라운 축복을 받은 안재선이 나중에 손양원 목사님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편지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아버님전 상서 천부님의 은혜 가운데 아버님 어머님 기체 만강하심을 비옵니다. 소자는 예수의 피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감사합니다. 이 죄인은 아버님의 사랑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죄값을 회개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음으로 중생하였습니다. 중생하였으나 소자는 인간인고로 때때로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죄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여 주심을 진실로 감사하며 죄를 회개합니다. 중생하고 보니 하나님께 몸 받쳐야 되겠습니다. 나의 있는 것 모든 것 다 받쳐야 되겠습니다. 우리 신자는 다 순교할 의무가 당연히 있다고 나는 주장합니다….우리가 죽도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하겠습니다….아버님 어머님의 기도의 덕인 줄로 믿습니다. 아버님 모든 것 용서해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사랑이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니 사도 바울의 뒷길을 따라가고자 한걸음 두 걸음 걷고 있습니다. 두 형님의 뒤를 따를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하나이다. 1949년 9월 15일 편지 받아본 즉시 저녁 안재선 상서.”

안재선은 완전이 변화된 새 사람이 되었고 안재선의 아들은 나중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목회와 전도의 방식과 비결”은 유창한 설교도 아니었고 심오한 신학강의도 아니었습니다.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몸에 지니시고 삶으로 나타내 보이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나타내 보이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었고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나타내 보인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었는데, 손양원 목사님께서 나타내 보이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손양원 목사님께서 1950년 9월 28일 밤 미평 과수원에서 공산당에 의해서 총살을 당해 순교하시면서도 자기에게 총을 쏜 공산당 군인을 위해서 사죄의 기도를 드리다가 세상을 떠나 주님 품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전도의 비결”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 더 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강변교회에서 28년 동안 목회하면서 새벽기도와 주일 아침 저녁 예배와 수요일 저녁 예배에 전력을 다하면서 동시에 불우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섬김”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교회 근처 구룡 마을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폈고, 교회 근처에 사는 불우한 노인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폈고, 강남구청에 의뢰해서 강남구안에 사는 어려운 사람들 50여명을 수년 동안 매년 12월 달에 초청해서 그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섬김”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방글라데시에 안과진료소를 하나 세워주게 되었고, 북한 동포들 돕는 일을 하게 되었고, 연변의 조선족 어린이들 150여명에게 18년 동안 후원의 손길을 펴게 되었고, 아프가니스탄의 불우한 어린이들을 위해서 학교 하나를 세워주게도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랑”과 “도움”과 “섬김”의 귀중한 일들은 전적으로 강변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자발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그 결과 세계 곳곳에 십자가의 사랑과 복음이 전파되는 “전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전도”는 가장 귀중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보람된 일들 중의 하나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소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즉 “전도” 하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한 말씀이 말씀을 전파하며 전도인의 일을 다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1-5). 즉 “전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도”는 말로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술을 습득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을 받음만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주님을 친밀하게 “만나야” 합니다. 성령님의 “감화”를 받아야 합니다. “회개”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지녀야 합니다. 생생한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전도”는 예수님을 만나서 그리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변화된 사람들의 “섬김”의 삶 즉 “착함”의 삶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몸에 지녀야 하고 그리고 “섬김”과 “착함”의 손길을 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산 예수마을선교교회에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전도”의 열매를 “섬김”과 “착함”의 손길을 통해서 많이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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