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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23] 교회란 어떤 곳인가?” (대하 7:12-16, 마 16:18, 엡 1:23) - 좋은 소식교회


제가 2008년 1월 13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다음 지난 12년 동안 매 주일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좋은 소식교회는 제가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다음 세 번째 주일인 2008년 2월 3일 주일 처음으로 와서 설교를 한 다음 지난 2019년 10월 6일 주일까지 18번 와서 설교를 했는데 설교 제목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008년 2월3일 처음으로 와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0년 9월 12일 두 번째로 와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어머니 교회의 모습”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1년 3월 20일 세 번째로 와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2년 5월 6일 네 번째로 와서 “어린이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2년 10월 14일 다섯 번째로 와서 “자원하는 신앙생활”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3년 10월 13일 여섯 번째로 와서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4년 2월 16일 일곱 번째로 와서 “성령의 감화와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5년 1월 18일 여덟번째로 와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솔한 삶”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5년 7월 5일 아홉 번째로 와서 “어루만져 주시고 안아주시는 위로의 하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6년 1월 3일 열 번째로 와서 “새해와 여생의 소원과 기도”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6년 7월 10일 열한 번째로 와서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7년 1월 22일 열두 번째로 와서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소망을 지니고”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2017년 7월 23일 열세 번째로 와서 “나의 삶과 사역을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2017년  12월 31일 열네 번째로 와서 “한 해를 돌아보고 새 해를 맞으며”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8년 6월 10일 열다섯 번째로 와서 “가장 귀중한 삶은 섬김의 삶”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8년 9월 9일 열여섯 번째로 와서  “오직 예수”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9년 2월 10일 열일곱 번째로 와서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9년 10월 6일 열여덟 번째로 와서 “응답 받는 올바른 기도에 전념하는 삶”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 2020년 2월 23일 주일 여기 열아홉 번째로 와서 좋은 소식교회 성도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설교를 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허기정 목사님과 이영란 사모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무슨 제목의 설교를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허기정 목사님이 오늘 “교회란 어떤 곳인가”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해 달라고 해서 오늘 “교회란 어떤 곳인가”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존재들 중에서 교회보다 귀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존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존재들 중에서 교회보다 귀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존재입니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교회는 성부 하나님께서 눈과 마음과 귀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의 눈과 마음과 귀를 솔로몬이 지은 하나님의 전에 기울이시고 그 곳에서 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죄를 사하시고 땅을 고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대하 7:12-16). 너무너무 귀중하고 축복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눈과 마음과 귀를 기울이시고 그 곳에서 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죄를 사하시고 땅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전입니다. 교회보다 귀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존재는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교회는 성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세우신 예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교회는 성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사시고 세우시고 지으신 예수님의 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찬 246). 저는 고등학생인가 대학생 때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대구 주암산 부흥회에 참석해서 찬송가 246장을 부르면서 울고 또 운 일이었습니다. 주암산 부흥회 어느 시간에 찬송가 246장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절 가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저는 1절을 부르다가 더 이상 찬송을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라고 찬송을 부를 때 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피를 흘려서 교회를 사셨을까?” “어떻게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교회를 사셨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놀랍고 너무 감사하고 너무 감격해서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또한 “늘 사랑합니다” 라는 가사에 “나는 늘 사랑하지 못하는데” “나는 늘 사랑하지 못하는데” 라고 생각하며 충격을 받으면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습니다. 아마 20여분 이상 계속해서 울었을 것입니다. 옆에 있던 어느 어른이 “학생 무슨 슬픈 일이 있어?” 라고 물었지만 저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울었습니다. 주님께서 피 흘려 사신 귀중한 교회를 늘 사랑하여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 라는 말씀을 귀중하게 여기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 교회를 더욱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성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세우신 예수님의 집인데 교회는 예수님의 머리와 몸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2,23).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엡 5:23).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골 1:18). 교회는 성자 예수님의 머리와 몸이라고 사도 바울이 거듭해서 지적했습니다. 너무너무 놀라운 사실입니다. 교회보다 귀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곳은 이 세상에 아무데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바로 성자 예수님의 집이고 머리와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셋째로 교회는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령님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님께서 강림하시고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므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결국 성령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고 임재하심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결국 예루살렘교회의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되었고 모두 성령님을 선물로 받은 성령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특히 집사로 세움을 받은 일곱 사람들은 모두 성령이 충만한 성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행 6:3).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 바나바도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행 11:24).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바로 성령님께서 임재하여 계시는 성령님의 전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  







이 세상에 존재하는 존재들 중에서 교회보다 귀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존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부 하나님께서 눈과 마음과 귀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또한 성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세우신 예수님의 집이기 때문이고 예수님의 머리와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령님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존재들 중에서 교회보다 귀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존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보다 귀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것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게 된다고 사도 바울이 경고를 했는데 우리들이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자기보다 돈보다 쾌락보다 더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귀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교회란 우리들의 모든 것을 쏟아바치며 사랑하여야 할 희생적인 사랑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을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주님과 교회를 자기들보다 자기들의 집보다 자기들의 일터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면서 날마다 교회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행 2:46).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면서 교회에 나와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를 전혀 힘썼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면서 교회에 나와서 서로 교제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면서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면서 교회에 다 함께 나와서 사랑과 구제와 봉사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 2:44,45).



주님과 교회를 자기보다 자기 집보다 자기 직장보다 더 사랑하는 일보다 귀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지금 날마다 교회에 모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주일 하루라도 종일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리면서 기도와 말씀 듣는 것과 교제와 섬김의 일을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일부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또는 일터와 놀이터로 가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녁 예배를 아주 없애 버린 교회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몽둥이로 맞거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부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죽이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출 31:14-17). “엿새 동안은 일하고 제 칠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날에 일하는 자를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출 35:2,3).



“안식일 성수”의 명령은 구약시대에 그친 것이 아니고 신약시대에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신약의 주일을 준비하는 예표였습니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구약 시대에 잠깐 동안 주어진 제도가 아니라 “대대로” 지킬 “영원한” 언약이고 표징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출 31:13,16,17).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완성자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 12:8). 안식 후 첫날 새벽 즉 첫 주일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위로와 기쁨과 함께 부활의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 즉 첫 주일 저녁에 부활의 주님께서 사랑하는 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위로와 기쁨과 사명과 성령을 부여하셨습니다. 그 다음 주일 저녁에도 부활의 주님께서 사랑하는 열 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위로와 기쁨과 사명과 성령을 부여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도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한 날도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날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식 후 첫날인 주일날 함께 모인 성도들과 종일 밤중까지 말씀을 전하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 20:7). 부활의 예수님께서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던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신 날도 “주의 날” 곧 주일이었습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계 1:10,11).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더 사랑하는 일보다 그리고 주일을 성수하면서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 드리는 일보다 귀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금 주일을 성수하면서 교회에 나와서 정성껏 드리는 예배가 앞으로 영원한 천국의 예배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권면을 했습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9-11). 다시 말씀 드리고 다시 말씀 드리지만 주님과 교회를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더 사랑하는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보다 귀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주일을 성수하면서 예수님께서 세우신 그리고 예수님의 머리와 몸이 되는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 드리는 일보다 귀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인데 하나님께서 부모님과 신앙의 선배님들로부터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주일 성수”의 신앙을 물려받아서 저의 몸에 지니게 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북한의 신의주 제이교회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주일 성수”의 신앙을 몸에 지니고 살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주일 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리는 것이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좋았습니다. 초등학생 때 평양에서 살면서 평양 제 오 인민학교에 다녔는데 북한에서는 주일에도 교회에 가지 못하게 했고 학교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2년 동안 주일 날에 한 번도 학교에 가지 않고 교회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결국 저는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았고 때로는 정학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때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신앙생활을 바로 하시다가 감옥에 붙잡혀가서 감옥생활을 자주 하고 계셨습니다. 저의 아버지께서는 신의주에서도 평양에서도 목회를 하시면서 맨날 감옥에 잡혀가서 감옥 생활을 자주 하셨습니다. 일본 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셨고 공산주의 시대에는 공산주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자유롭게 예배 드리기 위해서 11살 때 사랑하는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 38선을 혼자 뛰어넘어서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계시던 아버지를 찾아가서 주일을 바로 지키면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씀했을 때 아버지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던 “나는 너 없이는 못 살아” 라는 말을 자주 하시던 어머니도 제가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씀했을 때 어머니는 울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결국 저는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 뛰어넘어서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제기 11살 때인 1948년 8월이었습니다. 국경을 경비하던 군인들이 우리들을 발견하고 모두 서서 손을 들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같이 오던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서지 않고 혼자서 캄캄한 밤에 남쪽을 향해서 40분 이상 뛰었습니다. 언덕을 넘고 파 밭을 달리고 목에 차는 강을 건너서 남한으로 왔습니다. 저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스릴까지 느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고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주일 성수”의 신앙을 지니고 살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밤마다 남몰래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저는 남한에 와서 한 평생을 부모님을 이별한 고아와 나그네로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외롭게 살았지만 남한에 와서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주일 성수”의 신앙을 마음껏 누리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주일 성수”보다 귀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았는데 결국 주님과 교회를 뜨겁게 사랑한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그리고 천국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랑에 녹아져서 자나 깨나 하나님 사랑과 예수님 사랑을 고백하면서 “사랑 사랑 사랑” 이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7-11).다섯 절 가운데 사랑이란 말이 13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사랑과 간곡한 권면의 편지들을 써서 보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계 2:1,8,12,18,3:1,7,14). 사도 요한은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에 미쳐서 살다가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 이름을 사용하는 대신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사람” 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 13:23).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면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사도 요한을 가리키며 “보소서 아들이니다”(요 19:26) 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사울은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서 죽인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아 사울아” 라고 부드럽게 자기를 부르시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난 다음부터 사울은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에 미쳐서 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고전 16:22).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노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든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한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 12:10). 사도 바울은 또한 “교회 사랑”에 미쳐서 살다가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너무너무 사랑하며 사모했는데 저들을 위해서 자기의 피를 쏟아 제사를 드려도 자기는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을 너무너무 사랑했는데 저들을 위해서 자기의 재물과 생명을 다 바쳐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 12:15).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너무너무 사랑하며 보고 싶어했는데 저들이 자기의 소망이고 기쁨이고 자랑의 면류관이고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살전 2:17).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사도 바울은 “주님 사랑”에 미친 사람이었고 “교회 사랑”에 미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교회를 세우신 것처럼 순교의 피를 흘리므로 악의 중심부인 로마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씨앗과 거름이 되었습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사도 바울은 또한 “주일 성수”에 전력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식 후 첫날인 주일날 함께 모인 성도들과 종일 밤중까지 말씀을 전하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 20:7). 예수님께서 피 흘려서 사신 교회와 양 무리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주일 성수”보다 귀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교회란 우리들의 모든 것을 쏟아바치며 사랑하여야 할 희생적인 사랑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인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최권능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과 박윤선 목사님들은 자기 자신들보다 자기의 부모와 처자들보다 자기의 부귀 영화보다 주님과 교회와 양무리들을 더 귀중하게 여기면서 사랑으로 섬겼다고 생각합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주님과 교회들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섬기면서 사례비를 집으로 가지고 오지 않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자기와 가족들은 거지와 같은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은 주님과 교회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섬기면서 자기들은 삼무 사무 오무의 가난과 고난을 몸에 지니고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주님과 교회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섬기면서 아니 원수와 같은 사람까지 사랑으로 품으면서 예수님 닮은 가난과 고난과 죽음을 몸에 지니는 귀중한 삶을 살다가 순교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기도문 하나를 읽어드립니다. “주여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보다는 더 사랑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을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 해 일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맘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사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해서 즉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저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온갖 죄악을 몸에 지닌 죄인 중의 죄인인데 11살 때인 1948년 8월에 월남한 후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로 한 평생을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삶을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는 서울에서 살면서 신앙생활을 마음껏 했고,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서 대구로 피난을 가서 3년 동안 중학생 시절을 보내면서 신앙생활을 마음껏 했는데 저는 3년 동안 새벽기도를 거의 빠지지 않았고 주일에는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도 드리고 봉사도 하고 전도도 했습니다. 한국의 무디 라고 불리시던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12번이나 참석하면서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에는 서울로 돌아와서 김치선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창동교회에 다녔는데, 주일 아침과 저녁과 수요일 저녁은 물론 새벽기도회도 빠지지 않았고 주일에는 교회에 나와서 종일 예배와 기도를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교사의 일과 봉사의 일과 전도의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공부는 저의 삶의 둘째 셋째 목적이었고 주일을 종일 성수하면서 교회에 나와서 정성껏 예배 드리며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을 하는 것이 저의 삶의 첫째 목적이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께서는 새벽마다 우시면서 2만 8천여 동내에 기서 우물을 파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의 기도와 말씀에 순종해서 고 3때 토요일과 주일 왕십리 들판에 나가서 찬송을 부르고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어른들도 모여들었습니다. 사실 고 3때는 공부에 전념하는데 저는 전도와 목회에 전념했습니다. 그런데도 서울대학교 문리대에 합격을 했습니다. 천막을 사다가 교회를 세우고 2년 동안 개척목회를 했습니다. 나중에는 어린이들 60 여명과 어른들 40 여명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로 하여금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면서 고 3때와 대 1때 왕십리 들판에 교회를 세우고 목회사역을 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김치선 목사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귀중하고 크고 놀라운지 모릅니다.  



제가 12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한 후 귀국해서는 후암교회에서 5년 동안 교육 목사의 사역을 했고, 압구정동 영안교회에서 8개월동안 개척 목회를 했고, 그 후에는 강변교회를 개척해서 청담동과 도곡동에서 28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주일 성수”를 강조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강변교회에서 28년 동안 목회하면서 부족하지만 저의 사랑과 정성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시간도 바치고 집도 바치고 재물도 바치고 10여 년 동안의 사례비도 바쳤습니다. 저는 28 년 동안 목회하면서 새벽기도에 빠지는 일은 거의 없었고 주일에는 집에 가지 않고 종일 교회에 있었습니다. 교회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린이들과 새 신자들과 성도들과 교역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아주 아주 행복한 목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망극하신 은혜와 축복이었습니다. 지금도 부족하지만 은퇴 후 지난 12년 동안 주일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면서 순회 목회 사역을 하고 있는데 너무너무 감사하고 너무너무 기쁜 일입니다.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주님께서 피 흘려서 사시고 세우신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양 무리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보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와 양 무리들을 위해서 시간과 정성과 물질과 소유를 드리는 제물 되는 삶을 사는 일보다 귀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교회란 우리들의 모든 것을 쏟아바치며 사랑하여야 할 희생적인 사랑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와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도와주셔서 우리들도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을 따라서 우리들 자신보다 우리들의 집보다 우리들의 일터보다 우리들의 재산보다 우리들의 부귀나 영화보다 우리들의 생명보다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주일 성수”에 미쳐서 살다가 미쳐서 죽게 하시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주일 성수”보다 귀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주일 성수”를 위한 제물 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찬송가 246장을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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