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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23] 목적이 있는 교회(2) (마 5:1-12) - 도봉동 영신교회(오후 1시)


오늘 아침 11시 예배 시간에는 “목적이 있는 교회”(1)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지금 오후 1시 예배 시간에는 “목적이 있는 교회”(2)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마 5:13-16을 본문으로 교회의 머리와 몸이 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인데 교회는 “착한 행실”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가는 신앙 공동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 오후 예배 시간에는 교회의 머리와 몸이 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마 5:1-12에서 말씀하신 대로 교회는 팔 복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기를 힘쓰는 신앙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팔 복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선포하신 말씀을 따라서 회개하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된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리고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복음을 듣고 주님을 좇게 된 허다한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성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들에게 전파하신 팔 복의 말씀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팔 복의 말씀은 오늘 날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과 신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 귀중하고 아름다운 목회자와 신자들이 되기 위해서, 우리들 모두가 힘써서 따라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팔 복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들 교회의 목회자와 신자들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팔 복의 첫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눅 6:20에서는 그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사실 예수님께서는 심령뿐 아니라 실제적인 삶 자체가 가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심령뿐 아니라 실제적인 삶을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복이 있는” 목회자와 성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받는 축복은 천국에 이르는 복이라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는 부자와 거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다음에 부자는 지옥에 가고 거지는 천국에 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눅 16:22,23).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이유와 목적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이 부귀영화를 추구하면서 부자로 살지 말고 청빈을 추구하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귀중하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가르치시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께서는 “가난은 나의 애처” 라고 고백하면서 거지처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이성봉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도 청빈을 추구하면서 거지처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한국교회의 무디라고 불리시던, 부흥사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신 이성봉 목사님께서는 거지처럼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성봉 목사님께서는 부흥회를 인도하실 때마다 사례비를 적지 않게 받으시곤 했지만 그 사례비를 자기 개인이나 가족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보다는 작은 교회들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결국 사모님과 세 명의 딸들은 거지와 같은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나중에는 작은 집까지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고 합니다. 셋째 딸인 의숙양이 정신여고를 다니고 있었는데 의숙양이 교복대신 남루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이성봉 목사님 댁을 방문한 김동수 청년이 보고 가정부라고 생각했다가 이성봉 목사님의 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성봉 목사님과 의숙양을 귀중하게 여기게 되었고 의숙양과 친밀하게 교제를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결혼까지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예수님을 닮은 너무너무 귀중한 분이셨습니다. 저는 중학생 때 3년 동안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12번이나 참석하면서 너무나 큰 은혜를 받곤 했고 안수 기도를 12번이나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베푸신 너무나 크신 은혜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너무 부요한 부자가 되었는데 가난과 청빈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가난하게 사는 은혜를 받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팔 복의 둘째 복은 “애통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바라보시면서 맨날 울면서 애통하는 슬픔과 아픔의 삶을 사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 19:41,42).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도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부르짖으시면서 우셨습니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결국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도 울면서 회개하는 “애통”의 삶을 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예수께서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사도 바울이야말로 자기의 온갖 죄악의 성품을 바라보면서 맨날 울면서 “애통”하는 “회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1-24).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 4:17).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애통하는” 사람이 받는 복은 “위로함”을 받는 복이라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셨습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애통”하면서 “회개”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와 사랑을 한 없이 받는다고 성경을 지적합니다. 맨날 울면서 “애통”하는 “회개”의 삶을 산 사도 바울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와 사랑을 한 없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은혜” 라는 말을 하고 또 하고 또 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 사도 바울은 또한 “위로” 라는 말을 하고 또 하고 또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4-6).


한국교회의 아버지들이신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 들께서도 맨날 울면서 “애통”하는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또 드리는 귀중한 삶을 사셨는데 저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위로와 사랑을 넘치게 받으면서 행복한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찬송을 부르면서 “애통”을 사모합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기 합소서 예수여 비노니 나의 기도 들으사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찬송가 177장). 저는 중학생 때 3년 동안은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그리고 고등학생 때 3년 동안과 대학생 때 4년 동안은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은혜 사모의 은혜를 받고 또 받으면서 회개의 삶과 은혜 사모의 삶을 살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위로와 축복이었는지 모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너무 자만하게 되었는데 자신의 부족함을 직시하면서 애통하고 회개하면서 사는 진솔한 은혜를 받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팔 복의 셋째 복은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여기 “온유”는 모든 중류의 사람들을 품고 따뜻하게 받아드리는 사랑과 포용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땅”은 이 세상의 땅아 아닌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선물인 내세에 신자가 있을 곳” 이라고 박윤선 목사님께서 해석하셨습니다. 결국 “온유한 자”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실 천국의 집을 영원한 기업으로 얻게 된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시다고 말씀하시면서 온유와 겸손을 주님에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천국의 기업을 누리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모두를 품고 따뜻하게 받아드리는 “온유”와 “겸손”을 지니는 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마음이 쉼을 얻게 되고 그리고 천국의 기업을 얻게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두를 비판하고 거부하는 교만은 가장 위태로운 불신앙적인 삶의 자세와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는 그리고 모두를 받아드리는 “온유”와 “겸손”이 가장 귀중하고 축복된 신앙적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1902년 같은 해에 태어나신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들께서야 말로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니고 주님 닮은 수수한 신앙적인 삶을 사셨는데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예수님 닮은 “온유와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따뜻한 사랑과 도움과 섬김의 손길을 펴신 “온유와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목회 사역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찾아가는 사랑과 도움과 섬김의 손길을 펴신 “온유와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성 프랜시스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1932년 귀국 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신의주를 첫 목회지로 선택했고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는 1936년경 고아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1939년에는 고아들과 노인들이 함께 기거할 수 있는 “보린원”을 만들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가난하고 약한 자 그리고 원수들에게까지 사랑을 베풀며 따뜻하게 사는 것이 인간의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된 삶이라고 강조하시면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한국 나라와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봉사한 분이셨지만 동시에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세계를 품고 사랑하며 모두에게 따뜻한 사랑과 도움과 섬김의 손길을 펴신 “온유와 겸손”의 성자였습니다.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니고 사는 것이 너무너무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천국의 기업을 누리는 축복을 받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너무 자만과 교만을 지니게 되었는데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니고 모두를 품고 사랑하면서 따뜻하게 살아가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팔 복의 넷째 복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여기 “의” 라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는 죄인들을 바라보시면서 의롭지 않은데도 “의롭다” 라고 여기시는 “칭의”인데 그와 같은 “칭의”를 사모하되 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사모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이 세상의 부귀와 성공과 명예를 사모하기도 하는데 그런 것들을 사모하기 보다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의 작은 믿음을 바라보시면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칭의”의 축복을 사모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저주 받아 마땅한 죄인들의 작은 믿음을 바라보시면서 죄 사함과 의롭다라고 하시는 “칭의”를 선언하시곤 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한 여자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는 것을 보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죄인인 여자를 의롭게 보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 7:48,50). 성자 예수님께서는 또한 죄인중의 죄인인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싶어서 뽕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를 귀중하게 보시고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면서 세리장 삭개오를 의롭게 보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5-10).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너무너무 귀중한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사람들의 인정과 높임을 받는데 너무 많은 신경을 쓰게 되었는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인정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팔 복의 다섯째 복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사실 “긍휼”보다 귀중하고 아름답고 보배로운 덕목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긍휼”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지니신 가장 귀중한 성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에서 비롯했고 “긍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 145:9). 성부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하늘까지 상달한 니느웨 성을 바라보시면서 저주와 심판을 내리시기 전에 선지자 요나를 억지로 니느웨로 보내셔서 회개하게 하신 다음에 불평 불만에 사로잡힌 요나를 향해서 다음과 같은 “긍휼”이 충만하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0,11). 성자 예수님께서도 모든 죄인들에게 “긍휼”의 손길을 펴셨고 “긍휼”의 귀중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인 사울에게 “긍휼”과 용사와 사랑의 손길을 피시기도 하셨습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행 9:3-6). 사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에게 “긍휼”과 함께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는데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에게까지 “긍휼”과 함께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시면서 “용서”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드리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부활하신 주님의 “긍휼”과 용사와 자비와 사랑을 받아서 사도가 된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무엇보다 먼저 ”긍휼”을 옷 입고 그리고 용서와 사랑을 지니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 3:12-14).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께서야말로 “긍휼”로 옷을 입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몸에 지니고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너무 자만과 교만을 지니고 비판과 정죄를 일삼게 되었는데 “긍휼”을 몸에 지니고 모두를 품고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팔 복의 여섯째 복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여기 “마음이 청결한” 이란 말의 뜻은 허탄한데 마음을 두지 않는 “깨끗한 마음”(시 24:4, 딤후 2:22)과 복잡한 데 마음을 두지 않는 “단순한 마음”(박윤선 목사님의 주석)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깨끗한 마음”과 “단순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을 일편 단심으로 믿고 일편 단심으로 섬기고 일편 단심으로 사랑하는 깨끗하고 단순하고 청결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너무 세속적이고 다양하고 복잡한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깨끗하고 단순하고 청결한 마음을 품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만 일편 단심으로 바라보면서 살아가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팔 복의 일곱째 복은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이시지만 궁극적으로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온 세계가 원수들의 나라들을 포함해서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찌어다 하실 것임이니라”(사 19:23-25).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궁극적으로 이루실 것이 “화해와 평화와 통일” 이라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 사도 바울은 “화해와 화목”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지적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사도 요한은 온 세계와 우주에 종말적으로 이루어질 것은 세계와 우주에 사람들은 물론 모든 피조물들이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게 되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계 7:9-12).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도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게 하시는 일이라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오순절 날 수 천명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하나가 되어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하신 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하신 일라고 지적했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1,42). 사도 바울은 나중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되는 것을 강조하면서 하나 되기를 힘쓰라고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1-6). 오늘의 한국교회가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려고 최선을 다하는 대신 비판과 정죄와 분쟁과 분열로 치닫고 있는 것은 너무너무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한국교회가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어 나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그래서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도 조만 간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팔 복의 여덟째 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0-12). 여기 “의”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11절에 곧 이어서 예수님께서 “나를 인하여” 라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보다 귀중한 축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은 복이 있는데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서 핍박을 받고 또 받고 또 받는 것을 너무너무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받는 고난과 핍박의 리스트를 길게 나열하기도 했습니다(고후 11:23-27). 그리고 이런 귀중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인 길선주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최권능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들께서도 수 많은 고난과 핍박과 박해를 당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부끄러운 우리들이 아직까지 버림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심부름꾼들로 살아가고 있다고 저는 고백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고난과 핍박과 박해를 당하는 대신 평안과 대우 받음과 높임 받기를 바라고 소원한다고 생각하는데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처럼 좀 자원해서 주님을 위한 고난과 핍박과 박해를 당하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우리들의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의 삶과 사역의 목적을 어디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 데 그래서 가난과 청빈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삶을 우리들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애통하는” 사람이 되는 데 그래서 자기의 죄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애통”하고 “회개”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우리들의 삶의 목적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온유한” 사람이 되는 데 그래서 모든 중류의 사람들을 품고 따뜻하게 받아드리는 온유하게 살아가는 삶을 우리들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는 데 그래서 사람들의 인정과 높임을 받는데 너무 많은 신경을 쓰는 대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인정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삶을 우리들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는 데 그래서 자만과 교만을 지니고 비판과 정죄를 일삼는 대신 모두를 품고 사랑하면서 긍휼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삶을 우리들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섯째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되는 데 그래서 세속적이고 다양하고 복잡한데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깨끗하고 단순하고 청결한 마음을 품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만 일편 단심으로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삶을 우리들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곱째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는 데 그래서 피차 비판과 정죄와 분쟁과 분열로 치닫는 대신 남남과 남북과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어 나아가게 되기를 바라면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우리들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덟째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되는 데 그래서 평안과 대우 받음과 높임 받기를 바라고 소원하는 대신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고난과 핍박과 박해를 받는 것을 기뻐하는 삶을 우리들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축복이 사랑하는 영신교회의 교역자들과 성도들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셔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소금과 빛과 같은 귀중한 교회 그리고 팔 복의 말씀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귀중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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