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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5]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2) - 요 13:34,35, 요일 4:7-11, 신 10:17-19 - 사랑의 빛 교회(오후 2시)






오늘 오전 11시 예배 시간에는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 이라는 제목으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이 사셨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에 대한 설교를 했는데, 지금 오후 2시 예배 시간에는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 이라는 같은 제목으로 한국교회 역사에 나타난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이 사셨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제일 먼저 “한국교회의 아버지” 라고 불리시는 이기풍 목사님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을 아주 간단하게 줄여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기풍은 본래는 평양에서 유명한 깡패 두목이었는데 선교사를 때려 눕힌 핍박자였습니다. 그런데 이기풍은 회개한 다음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당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일곱 분 목사님들 중의 한 분으로 안수를 받은 후 윤함애 사모님과 함께 그 당시 이방과도 같은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13년 동안 제주도 복음화에 전력을 다했는데 수 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고통스러웠고 미신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고통스러웠습니다. 잠잘 곳도 얻지 못했고 먹을 것도 얻지 못해 때로는 산 기슭에 때로는 바닷가에 때로는 마구간에 쓸어져 기운이 없어 정신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기풍 목사님의 성공적인 제주도 선교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님의 기도와 함께 “사랑과 섬김”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윤함애 사모님은 기도의 여인이었고 특히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한” 여인이었습니다. 윤함애 사모님은 항상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 주었다고 합니다. 윤함애 사모님은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윤함애 사모님은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돌보았습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들 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나환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제주도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힌 두 개의 새벽 별들이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의 처절한 기도와 함께 따뜻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이 제주도 복음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너무 귀중하고 너무너무 아름다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한국의 무디” 라고 불리시던 한국 최고의 부흥사 이성봉 목사님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을 아주 간단하게 줄여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국의 최고의 부흥사로서 부흥회를 인도하실 때마다 받으시는 사례비를 자기 개인이나 가족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일은 거의 없었고 사례비를 주로 어려움에 처한 작은 교회들과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나중에는 가지고 있던 작은 집까지 팔아서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하셨다고 합니다. 결국 사모님과 세 명의 딸들은 거지와 같은 가난한 청빈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 자신도 거지와 같은 가난한 삶을 사셨는데 전국 곳곳으로 부흥회를 인도하러 다니실 때 자동차도 없이 소 구루마와 리어카와 자전거 꽁무니에 타고 다니셨는데 때로는 길가에 넘어져서 상처를 입기도 하셨고 잘 곳이 없어서 소 외양간에서 자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가난과 고난을 몸에 지니고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시면서” 사신 너무너무 귀중하고 너무너무 보배로운 신앙의 선배님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6.25 피난시절 중학생이었는데 대구에 가서 3년 동안 피난생활을 하면서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12번을 참석했습니다. 제일 앞 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께서는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지옥 간다” 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때부터 회개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난과 청빈의 삶을 귀중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2002년 5월 1일 신촌 성결교회에서 열린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 강연회에서 강의를 했는데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 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제가 아홉 가지 제목으로 발표를 했는데 그 제목들 중의 하나가 “현세를 초월한 깨끗한 청빈의 삶”이었습니다. 최고의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님께서는 부자 중의 부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작고 불우한 교회들과 사람들을 돕는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을 사시므로 “현세를 초월한 깨끗한 청빈의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너무 귀중하고 너무너무 아름다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사랑의 원자탄’ 이라고 불리시던 손양원 목사님의 따뜻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을 아주 간단하게 줄여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주님 사랑과 나환자 사랑과 원수 사랑에 미쳐서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길로 달려가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은 박옥선이란 나환자가 발 밑에 난 종기 때문에 다리를 절단해야 할 만큼 심각하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입으로 악취 나는 피고름을 빨아 주었습니다. 나병의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이 나환자 되기를 소원하시면서 나환자들에게 모든 사랑과 정성을 다 쏟아 부은 한국의 프랜시스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과 섬김”의 노래의 가사를 인용합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보다는 더 사랑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을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이 몸과 맘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제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을 때 어느 여름날 아침 남대문 네거리에 있던 기독교 서점에서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을 사 들고 제가 새벽기도 후에 매일 올라 가서 30여분 이상 기도하던 남산의 어느 숲 속에 올라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그 책을 읽으면서 울고 또 울고 기도하고 또 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손양원 목사님은 제가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는 그리고 닮고 싶은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저는 2003년 2월 18일 손양원 목사님의 시신과 정양순 사모님의 시신과 두 아들의 시신이 함께 묻혀 있는 여수 애양원 묘지 앞에 서서 가슴이 저려오는 아픔과 감동을 받으면서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손양원 목사님은 일본 사람도 사랑했고 공산당도 사랑했고 두 아들을 죽인 원수도 사랑했고 버림 받은 나환자들을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따뜻하게 펴시면서” 따뜻하게 사시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너무너무 귀중하고 아름다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한경직 목사님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을 아주 간단하게 줄여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칠 무렵 결핵 말기에 처하게 되어서 절망에 빠지게 되었는데 성 프랜시스의 “사랑과 섬김”의 삶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고 서울이나 평양이 아닌 신의주로 돌아와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을 살기 시작하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신의주 제이교회에 담임 목사로 목회의 사역을 시작하셨지만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신 일은 고아와 노인들에 대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삶” 이었습니다. 사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신의주 제이교회 시절부터 서울 영락교회 목회 시절까지 목회의 사역을 하시면서 모든 종류의 불우한 사람들에게 온갖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신” 절대적인 “사랑과 도움”의 삶을 사신 대표적인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신의주에서는 고아원과 보린원을 설립하여 고아들과 노인들을 친히 돌아보셨고 나중에는 서울에서 영락 보린원을 비롯하여 모자원, 경로원, 노인 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 집, 재가 노인 복지 상담소 등을 세우셨고 월드비전을 창설하셨고 사랑의 쌀 나누기운동도 펴 나아가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말이나 지식으로 설교하고 목회하신 분이 아니라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으로 설교하시고 목회하신 너무 너무 귀중 하시고 보배로운 신앙의 선배님 이시라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신의주에 계실 때 남 신의주에 큰 뚝이 하나 있었고 거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는데 한경직 목사님께서 교회에서 사례비를 타시면 그 곳으로 달려가서 헐벗은 사람들과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시고 빈 손으로 돌아오시곤 했다고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나중에 1992년 5얼 7일에 영국 버킹엄 궁에서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톤 상을 수상했는데 상금을 받은 다음 날 북한 사람들을 돕는데 쓰라고 내 주었다고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한국 사람들은 물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는데 미국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님을 가리켜 “제가 가장 존경하고 사모하는 분” 이라고 부르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목회자들 가운데 한 사람” 이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한 목사님과 같이 있으면 저는 부족한 부분들을 많이 느꼈기에 그 분을 닮게 해 달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인 한 살 때부터 평생토록 한경직 목사님을 자주 만나면서 사랑을 받곤 했는데 특히 한경직 목사님께서 은퇴하신 후 26년동안 남한 산성에서 사시는 동안 자주 만나고 사랑과 가르침을 받으면서 살게 된 것은 너무 너무 큰 은혜와 축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한 산성에서 마지막까지 한경직 목사님을 돌아보시던 백운경 장로님이 제가 남한 산성을 방문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말을 하시곤 했는데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한 목사님이 김 목사님이 오면 제일 반가워하십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은 너무 너무 귀중하고 너무 너무 아름다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작은 예수” 라고 불리시던 장기려 박사님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을 줄여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아시아의 최고 수준의 의사였는데 무소유로 가난하게 청빈의 삶을 사셨습니다. 평생 집이나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검소하고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베풀면서”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그는 이런 소원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자, 의사를 한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의 삶의 목적은 명예도 행복도 부귀도 아니었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삶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도우면서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우리 주님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죄인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도 사랑하셨고 중풍병자도 사랑하셨고 세리도 사랑하셨고 창기도 사랑하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도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을 베풀면서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그는 경성 의학전문학교를 지망하면서부터 이런 소원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의과대학에 들어가게만 해 주신다면 의사를 한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1932년 경성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후 경성 의전부속병원에서 일하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940년 일본 나고야 대학에 제출한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평양 연합기독병원의 외과 과장으로 일하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치료의 손길을 폈습니다. 1947년부터는 김일성 대학의 외과학 교수 겸 외과 과장으로 성실하게 일하다가 1950년 12월 둘째 아들과 함께 월남했습니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 병원의 시작이었고 나중에는 오늘의 고신 의료원이 되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1950년 12월 4일 앰블란스를 타고 피난민들로 북적대던 평양의 종로 거리를 달렸는데 그때 피난민 대열에 끼어 있던 아내와 다른 자녀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차마 차를 세워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둘째 아들과 함께 남하했는데 그때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남하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간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지울 수 없는 그 아픔과 한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자기의 죄 값을 갚으려는 듯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한 없는 끝 없는 “사랑과 도움”을 쏟아 부으면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1969년부터 8천 여명의 간질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다고 합니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 고민하는 환자들을 몰래 밤에 병원 뒷문을 열어주면서 집으로 돌려보내기가 일쑤여서 항상 병원 행정 직원들의 볼멘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1976년까지 25년간 복음 병원의 원장으로 일하면서 환자를 돌보는 일과 의학연구에 몰두하면서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명절 때 자기를 찾아오는 제자나 며느리나 손자에게 주는 세뱃돈은 1천원 밖에 주지 않았지만 거지에게는 10만 원짜리 수표를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0만 원짜리 수표를 소지한 어떤 거지가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복음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로, 부산대 의과대학 교수로, 서울 카토릭대 의과대학 교수로 봉사하기도 했습니다. 수 많은 의학 논문을 발표했고 간암에 대한 연구로 1961년에는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그는 환자들에게는 한 없는 사랑을 베풀었고 한국 의학계에는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그는 1975년에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하므로 그의 사람 사랑과 사회 봉사의 업적이 아시아적으로 인정 받기도 했습니다.

사실 성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병든 자들과 죄인들을 위함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도 그의 삶의 목적은 명예도 행복도 부귀도 아니었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섬김”의 손길을 펴는 것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죄인인 한 여인이 주님의 사랑에 너무나 감격하여 옥합을 가지고 와서 울며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듯이, 장기려 박사님의 사랑을 받은 수 많은 사람들도 그 사랑에 감격하여 “사랑과 봉사”의 삶을 새롭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건오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 박사를 만나고 나서 나는 그의 복사판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의 삶이 너무도 헌신적이고 투명해서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장기려 박사님의 삶의 철학은 “사랑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지고 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 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은 영원한 것, 사랑은 생명 자체이다.” 그는 신학 이론이나 교리나 교회의 제도나 전통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들은 자칫 잘못하면 냉랭한 이성의 동의는 얻을 수 있으나 가슴을 움직이는 감동은 주기 힘들다 라고 생각하며 “사랑 실천”의 삶만이 가장 가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강조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과 도움과 봉사”의 삶은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고신대의 이상규 교수는 장기려 박사님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생애와 삶은 한국교회 현장에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었다.”

장기려 박사님의 사모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원의 사랑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1950년 12월 아내 김봉숙씨와 5자녀를 북한에 두고 월남한 후 45년 동안 아내를 그리며 홀로 살았습니다. 재혼하라는 권유를 받을 때마다 "우리의 사랑은 육체의 이별과 무관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살기 위해 혼자 산다" 라고 말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1990년 6월 80세가 된 노인으로 아내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슬픔의 글을 다음과 같이 띄우기도 했습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여보! 그날 아침 당신과 애들을 먼저 대동강변에 보내지 않았더라면… 또 종로 거리에서 차를 세우기만 했었다면, 여보!”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살아서 아내와 만날 수 있기를 빌고 있지만 사실 나이 팔십이 넘었으니 살아서 못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천국에서까지 영원할 것입니다.” 한번은 그의 제자들인 재미 의료인들이 장기려 박사님이 중국이나 제 3국에서 사모님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습니다. “이산 가족이 어디 나 혼자 뿐이냐 나 혼자만 가서 가족을 만나면 다른 이산 가족의 슬픔이 어떠하겠느냐. 통일이 되면 모두 함께 가서 만나지.” 그의 사랑은 너무나 높고 깊고 넓은 이타적인 민족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자신의 그리움보다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94년 그가 제2차 남북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확정되었을 때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흥분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1994년 2월 제2차 남북 고향방문의 교환 합의가 무산 되었을 때 그는 너무나 큰 슬픔과 충격을 받고 그 해 10월 심한 뇌졸중으로 쓸어졌는데 결국 그 뇌졸중으로 1년 2개월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평양을 방문하여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대신 만나기는 했습니다.

춘원 이광수는 척추결핵으로 경성 의전부속병원에서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주치의가 장기려 박사님이었다고 합니다. 춘원은 장기려 박사님의 순수한 인격과 영혼에 매료되어 장기려 박사님을 그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인 의사 안빈의 실존 모델로 삼았는데 그때 장기려 박사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성인이 아니면 바보요." 그는 돈이나 출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점점 우리들의 사랑이 이기적이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으로 되어가는 이 시대에 장기려 박사님은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이 어떤 것임을 우리들에게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미움과 적대와 대결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와 한반도 안에서 우리가 힘써 실천해야 할 일이 바로 우리의 가족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일임을 우리들에게 말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사랑의 통일론"을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이념도 한낱 쓰레기일 뿐 우리는 무력도, 경제력도 아닌 오직 사랑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 병든 우리 사회를 치료하고 살리는 길도, 깨어져 가는 우리들의 가정을 치료하고 살리는 길도, 분단된 이 땅에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가져 오는 길도, 바로 이와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의 생애와 삶은 참으로 “한국교회 현장에 떨어진 거룩한 사랑의 폭탄”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은 너무너무 귀중하고 너무너무 아름다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2) 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오늘 오전 11시 예배 시간에는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 이라는 제목으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이 사셨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에 대한 설교를 했는데 지금 오후 2시 예배 시간에는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 이라는 같은 제목으로 한국교회 역사에 나타난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이 사셨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보다 더 귀중하고 더 아름답고 더 축복된 삶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도 우리 한국교회에 허락하신 신앙의 선배님들도 너무너무 귀중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 중의 죄인인데 저도 성자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그리고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을 살수는 없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북한동포 돕기, 중국 연변 지역의 불우한 조선족 학생들 돕기,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 주민들을 위한 우물 10개 파서 주기, 방글라데시의 불우한 환자들과 학생들 돕기, 아프가니스탄의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건축해주고 학용품을 보내며 돕기, 그리고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필리핀 루마니아 일본 등을 방문하며 어려움에 처한 주민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일에 참여했고 최근에는 작년 6월부터 매달 한 번씩 서울 개포동의 구룡 마을을 방문하며 가난과 고난 중에서 살아가는 마을 주민들에게 조그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고 있는데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야 할 대상은 가까운 이웃들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하늘에까지 찬 심판을 받아 마땅한 니느웨 사람들을 아끼면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셨고 성자 예수님께서는 이웃은 물론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이고 거짓되고 게으르고 나태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셔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을 사신 성자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그리고 성경과 한국교회에 허락하신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우리들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중한 삶”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살다가 죽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드림과 나눔”의 삶을 살다가 가볍게 죽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찬송가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369, 218)를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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