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오가는 자동차들을 살펴보면,성한 차들이 거의 없습니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차마다 어딘가에 크고 작게 긁히고 부서지고 우그러든 곳이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수많은 사람들 중에,정말 건강해서 평생 약국 근처엔 얼씬 않고도 잘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정말이지,멀쩡한 겉모습과는 달리,몸이 그리 실하지 못한 이가 너무 많습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두차례나 골절상을 입은 오른쪽 발목,성장과정에서 생긴 살갗의 여러 흉터 등등은 그만두더라도,오랜 세 월 저를 괴롭혀온 질병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기관지 확장증.
폐 속에 가지를 치고 있는 세(細)기관지의 일부 내강이 어떤 이유로 늘어나,거기에 만성염증이 생겨 가래가 고이는 병입니다. 현대의학으로도 단지 악화되는 것만 막을 수 있을 뿐,회복시킬 수는 없는 병인데,천만 다행히도 오른쪽 기관지에만 문제가 있고 왼쪽은 괜찮아서,그렁저렁 견뎌오고 있습니다.
다른 곳은 그야말로 무쇠처럼 강건한데도,이 늘어져버린 기관지와 탁한 공기 때문에 편리한 도회지 생활이 제겐 썩 달갑지를 않습니다. 서울에서의 사역을 포기한 것도 실은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50년대, 6·25의 흔적이 우리 사회 곳곳에 진하게 남아있던 시절,거리마다 문둥이,폐병환자,거지,상이군인들이 무법자처럼 활개치던 시절,미국에서 들어온 원조물자로 근근히 모진 목숨을 연명하던 시절에 저는 유년기를 지냈습니다.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되던 처절하게 가난하던 시절에 번듯한 병원과 의약품이 있을 리 만무했고,면소재지에 있는 어설픈 의원이나마 30리길을 걸어나가야만 하는 산골에 살던 다섯 살 때,저는 두 살 아래 제 누이와 함께 홍역을 앓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홍역을 앓다가,참 영특했던 제 누이동생은 그만 세 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습니다. 거적에 싸인 내 누이가 말없이 누운 지게를 진 어떤 청년이 마을앞 개울을 건너던 뒷모습을 저는 아직도 축축하게 기억합니다.
누이를 잃으며 홍역은 겨우 나았지만,홍역 끝에 백일해를 연달아 앓으면서 그만 제 오른쪽 기관지에 확장증이 생겨버렸습니다. 이후 지금까지도,근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저를 끈질기게 괴롭혀 온 것이 이 병입니다.
덕분에 감기란 감기는 모조리 걸리고, 걸핏하면 그 감기 뒤끝에 폐렴을 앓고, 한 번씩 몸져눕게 되면 고열과 객담으로 세상이 뒤엎어지는 것같은 혼수에 빠져 들기를 수없이 되풀이했습니다. 일부러 아프는 것은 아니었지만,그간 부모님의 애간장을 무던히 태워드리는 불효를 많이 했지요.
특히,을씨년스런 국립대학 기숙사, 겨울엔 냉방시설완비,여름엔 온방시설완비된 '국립 토끼장(?)'에서 생활하던 대학 1-2학년 때는 증상이 더 심해져서, 2-3일마다 초기 폐렴증상으로 시달려야했고,나날이 퀭하게 뚫리는 눈,드러나는 광대뼈가 보기 싫어 거울 앞에 서는 게 두려운 나머지,급기야 자살을 진지하게 검토한 적도 있었습니다.
결국 용기가 부족했고,또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어 자살을 결행하지는 못하고,'자살(自殺)'의 글자순서를 살짝 바꿔 '살자'는 말로 재생을 다짐하고 오늘까지 왔지만,이 병이 그간 제 인생에 적잖이 심각한 영향을 미친 것만은 사실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왼쪽 기관지만은 매우 건강하고,또 오른쪽도 증상이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는 듯하여 요즘 하루 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건장한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어이없게도 "독감바이러스"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독감 바이러스가 일단 몸에 침투해서 자리잡기 시작하면,아무리 황소장사라도 죽도록 고생하기 마련인데,이 바이러스로 인한 증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어떤 땐 고열로 오한이 나기도 하고,또 어떤 땐 목이나 코가 심히 아프기도 하며,가래가 많아지거나 콧물이 흐르기도 하고,뼛속이 오독오독 쑤시기도 합니다.
다양한 복합증상을 보이는 독감바이러스를 생각지 않고,대증 요법에 치중하다 보면,약기운으로 몸만 망가질 뿐 치료는 잘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젠가 제 오른쪽 아랫배에 있는 흉터의 내력을 묻는 제 딸 아이에게,
"탈이 생긴 맹장을 떼어내서 그렇다"
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며칠 있다가,제 아내가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괴로워하자,세 살 박이 딸아이가 밥상머 리에서 느닷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머리 아파? 그럼 머리 떼어내 버리면 되잖아?"
아이의 엉뚱한 생각에 함께 한바탕 웃고 말았지만,곰곰 생각 해보면,우리 주변에서,우리 딸아이 식으로 함부로 처리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콧물 난다고 코를 막아버리고,열이 나면 냉동실에 넣어버리고,목이 아프면 목을 졸라버리는 식으로는 독감을 결코 치료하지 못합니다. 이 복잡한 모든 증상들은,
보이지 않는 독감 바이러스를 잡아버리면 한꺼번에 정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증상은 달라도 원인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죄는 불법이라. (신약성경 요한일서 3장 4절)
오늘 우리들의 삶을 어둡고 슬프게 만드는 모든 불의,폭력,착취,거짓,부도덕,추악 등의 근본원인(죄)을 간과한 채,코를 막고,목 을 졸라 떼는 식의 대증처방으로는 우리들 개인의 삶이나 사회 공동체가 결코 온전해질 수 없음을 우리 모두가 언제나 깨달을 수 있을는지요. 우리 사회를 고열과 혹독한 염증으로 고통하게 만드는
"죄악의 바이러스"
를 방치한 채,아무리 처벌을 강화하고 제도를 바꿔도,시간만 갈 뿐 우리 삶이 밝아지지는 못할 것입니다. 모든 불법은,우리네 마음 속의 보이지 않는 죄로부터 샘솟듯 솟구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광우목사
전주열린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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