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또래 요즘 중년들의 학창시절에, 어쩌다 한번씩 있는 단체 영화관람은, 입시지옥의 따분한 일상에 아주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주는 매우 의미 있는 행사였습니다.
비록 비좁은 읍내극장 에서의 치열한 자리다툼이 늘 따르고, 그 결과 때로는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 내내 팍팍하게 또래의 아이들 틈에서 머슴애냄 새 땀냄새에 시달려도,아주 파격적인 관람료는 물론,극장측과 선생님들과의 영화상영시간 협상에 따라, 신나는 단축수업을 하 거나 어떤 때는 아예 오후수업을 뭉떵 잘라먹은 채 영화를 볼 수 있었으니, 입시공부에 진력이 난 우리 학생들의 입장에서, 영화단체관람은 늘 벅찬 해방의 감격 속에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때문에, 극장을 향해 줄서서 걸어가면서 우리는 늘, 광복절 노래 를 각색하여,
'책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를 낭랑하게 부르곤 했습니다. 세월이 한 30년 넘게 흐르다보니, 무슨 무슨 영화들을 보았는 지 별 기억이 없고, 있다해도 거개가 흑백영화 시절의 것들이어 서 추억조차 흑백으로 가물거릴 때가 많습니다. 대개는 충효사 상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된다싶은 권선징악적인 주제의 영화 를 많이 보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가끔씩은 순수 오락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오락물 가운데서 어린 우리 들에게 단연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이안 플레밍 원작의 "007시리 즈"였습니다. 그래,주인공 제임스 본드 역을 담당했던 숀 코넬 리, 제임스 무어 등의 이름이 지금까지도 생생합니다.
영화를 본 다음 날 학교의 휴식시간이면,책상 위 아래를 날 아(?)다니며, 본드의 강렬한 눈매와 몸짓 등을 흉내내기 바빴던 시절도 있었지요. 제임스 본드가 알프스에서 스키로 탈출을 하 는 장면이 많아서 스키를 잘못 타는 '숀 코넬리' 대신 스키선수 출신의 '로저 무어'가 새로운 제임스 본드로 바뀌어 나왔을 때, 어린 마음에 '이제 007시리즈도 한물 갔다'고 비평을 할만 큼,007시리즈가 어린 우리에게 주는 인상은 사뭇 강렬한 것이 었습니다.
눈부신 서구의 이색적인 풍물과,등장하는 첩보요원들의 선 굵은 외모,양념처럼 등장하는 본드의 보조역 팔등신 미녀들(대 개가 임무를 마친 뒤 본드와 함께 아름다운 바닷가로 낭만적 인 휴가를 떠남),정말 신기한 신무기와 신식장비의 등장,강한 스릴과 서스펜스 등,너무나도 신선한 재미를 많이 제공하는 것 이 007시리즈의 주요 매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참,지독한 '콩글 리쉬'를 하면서도,비오듯 어른거리는 자막과 음성을 용케도 짜 맞춰 화면 속의 영어단어 하나를 주워들었을 때 느껴져오는 쾌감 또한 짜릿한 별미였지요.
우리 사회에 '컴퓨터'라는 낱말조차도 없던 시절,영화가 시작 되자마자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이것도 요즘 와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된 007시리즈 특유의 초기 시그널화면도 매우 인상 적이었습니다.
……화면 전체에 커다란 눈동자가 그려지고,그 눈동자가 한번 깜박일 때마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 객석을 향해 걸어나오면서 점점 화상이 커지고,그러다가 관객을 향해 아주 날랜 자세로 사격을 하고 잽싸게 화면 한쪽으로 사라져 가는 정말 환상적인 초기화면…….
첩보활동에 진력이 난 제임스 본드가 정말 억지로 또다시 사건에 뛰어들게 되는 초기 스토리에서부터 본드는 이내 '우리 편'이 됩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 내내 초가을 운동회 맨 마 지막의 청백계주마냥,제임스 본드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그의 실패는 곧 나의 실패가 됩니다.
영화 속에서 정말 위기일발의 상황이 전개되면,주인공에게 어떻게든 그 위기를 알려주려는 순진한 열성파들의 고함,그러다가 정말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본드가 그 위기를 벗어날 때마다,한꺼번에 내 쏟는 우렁찬 환 호성으로 낡은 극장건물은 늘 통째로 숨가빴습니다. 숱한 위기 끝에 최종적으로 '우리편'의 승리가 확정되고 악독한 저쪽편이 폭삭 망할 때의 그 통쾌함을 안고,눈부신 하오의 햇살 아래 극 장 문을 밀려나오면서 어린 우리는 다시 입시지옥의 초라한 현실로 마지못해 돌아오곤 했습니다.
내 아들아,여호와(하나님)와 왕을 경외하고 그 반 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그들의 멸망(파멸)을 누가 알랴? (구약성경 잠언 24장 22절)
십여년 전, 침몰한 서해페리호의 선실내부,필사의 탈출을 시도하 다 하다 숨진 이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알제리 회교과 격파에 의해 납치되었던 에어프랑스기의 승객구출 작전 시,그 높은 조종석에서 목숨걸고 뛰어내리던 부조종사의 모습,성수대 교 붕괴 때의 필사적인 탈출,홍수나 화재를 당했을 때의 사람들 의 필사적인 탈출 모습……,정말 007 영화를 뺨치는 것들이었습니다.
지금,하나님 없이도 잘 나가는 당신의 삶,강력한 무기의 적 앞 에 선 맨손의 제임스 본드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단 한번뿐인 우리의 삶은 오락영화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기일발의 당신,이제 그만 죽음의 길에서,
"속히" 탈출하십시오. 필사적으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