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짝사랑의 형벌을 받고 있다. 그 옛날 어미 잃은 손녀를 키워내신 내 할머니가 받던 짝사랑의 형벌이다.
내 아들 키운지 25년만에 내게도 손녀가 태어났다. 온 집안이 새날이 되었다.
내가 할미가 되어서야 어렴프시 떠오르는 아름다운 초상! 나의 할머니! 내 심장의 고동을 들으며 새근거리는 내 손녀 이현이! 나는 내 할머니의 자장가를 드디어 살려내게 되었다.
마냥 웃기만 하셨던 내 할머니! 반찬내음 후지근한 앞치마에서 보물처럼 간직했다가 내어 밀던 삼치 한토막! 하얀살만 먹는다고 삼치장사에게 시집보낸다 하셨다던 할머니!
할머니께선 온양온천 철도호텔 주방일을 하셨다. 이승만박사께 탕평채를 해드려서 악수하신 적이 있다고 늘 오른 손을 자랑하셨고 김구선생님 밥숫가락이 소담하셨다고 그림처럼 그려내곤 하셨다.
할머니는 종종 할아버지께 몹시 꾸중을 들으셨던 기억도 난다. 아랫집 심씨네 마실을 자주 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가 역맛살이 낀 남의 집을 좋아하시는 끼 많은 여인인 줄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다.
훗날 고모님이 알려주신 바로는 삶이 고달픈데 일하는 며느리들 앞에서 낮잠을 주무실 수 없어 심씨네로 피신 가셨다고 한다.
심씨네는 동네 할머니들 아지트로서 모여서 화투를 치며 한담을 하는 곳이었다. 할머니는 종종 거기 가셔서 한모퉁이에서 주무시고 오셨단다. 이 말을 전해 듣고 나는 흥건히 고이는 눈가를 훔쳐내었다.
그 흔해 빠진 민화투 한번 못해 보시고 잠깐씩 잠을 주무셔야 살아가실 수 있었던 할머니. 눈에 서언하게 할머니의 어진 미소가 생각난다.
'할머니의 약손'이 몹시도 그리운 엊저녁엔 이현이의 엉덩이를 마싸지를 해주었다. 할머니가 부르시던 곡조로 '할미손은 약손!' 그리고는 지난 밤 이현이 꿈을 꾸었다.
이현이가 똑 떨어지게 '할미!' 라고 나를 두번이나 불러주는 꿈을! 나는 이토록 이현이를 짝사랑한다.
짝사랑! 그거 참 좋은 것이다. 짝사랑의 행복을 뉘라서 알겠나? 아니! 그것은 차라리 형벌이다. 응어리진 가슴에 혼자만 마냥 설레이는 행복이다. 둘이라면 부서질듯하고, 마주치면 불타버릴 아까운 행복이다.
엄마들, 그리고 할머니들, 여인들은 오늘도 짝사랑 청춘이란걸 뉘라서 알까? 늙으면 아무런 기쁨이 없는 줄 알았다. 쇠퇴하는 서글픔과 허무만 깃들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석양의 황홀함이 일출 못지않게 아름다운 것처럼 늙음을 통해서만 맛볼 수 있는 고귀한 기쁨과 만족을 보물처럼 숨겨놓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손녀를 이토톡 짝사랑하는 할미에게 날마다 흥분되는 행복이 기다릴 줄이야! 할머니의 사랑을 할미 되어서야 깨닫게 되니 늦어도 이젠 짝사랑일 수 없게 되었다.
지난해 1월 18일 할미가 되던날 써 놓은 일기를 올려본다. 훗날 이현이가 할미 되는 때 나의 짝사랑도 열매 맺으리...
할매가 된 날!
드디어 오늘 할미가 되었습니다. 2000년1월18일 오후4시32분에 2.71kg 손녀가 출생했습니다.
태줄을 두겹이나 감고 나온 아기는 심장박동이 흐려지는 위기를 당했죠.
에미는 숨막히는 고비를 헤쳐내느라 설치된 기둥을 잡고 있었는데 탈진상태였습니다.
아기를 위해 호흡을 잘 해야한다는 의사의 말에 산소호흡기를 두손으로 감싸쥔 채 위험한 순간을 잘 극복해 냈습니다.
아기가 잘못될까봐 염려하는 엄마에게서 초인적인 힘이 나왔던 것입니다. 모성애는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참 장하더군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간호사가 아기를 받아 호흡시키는데 옛날처럼 두손으로 거꾸로 쥐고 등을 두들기는 출산폭력은 이제 사라졌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호흡을 유도하는데 아기가 '웅얼웅얼' 이상한 소리를 낸 모양입니다.
곡조가 붙었던 모양이죠? 간호사가 말하기를 "이 아기는 왜 울지를 않고 노래를 해요?" 라고 해서 모두 한바탕 웃었답니다.
목에 태줄을 감고 나오느라 기운이 없어 힘차게 울지를 못했던지? 어찌되었건 "노래하면서 나온 아기!" 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비가 성악을 전공한 것을 간호사가 나중에야 전해 듣고 더 많이 웃었습니다.
졸지에 고모가 되어버린 내 딸이 아빠가 된 남동생을 놀리는 겁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새 아기가 솨솨솨 중얼중얼 그러는거 아니야?" 스타그래프트 오락하는 손가락 흉내를 내면서요.
할아버지가 된 남편은 신이 나는 모양입니다. "오늘은 나도 업그레이드 되는 날이구먼! 아버지에서 할아버지로..."
그런데 오늘 인천엔 오랫만에 흰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우리 새아기를 백설공주라하면 어떨까요? 거울로 들여다 보는 할멈이 있을지도 모르죠.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인천 간석동에 백설공주님이죠!" 평생 오늘 보다 더 기분 좋은 날이 또 있을까요?
남상순
인천YWCA 이사
청암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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