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된 아들녀석이 칭얼거리며 울기에 무슨 일인가 물었던 적이 있다. 이유인즉은 "심심해서" 운단다. 지금은 장가들어 아빠가 되었고 얼굴 마주할 시간조차 없이 바쁜 군복무 중이다. 우리 주변에 심심해서 울고 있는 사람들은 없을까?
나는 목사의 아내이다. 교인들 입에서 종종 우리 사모님은 "너무 바쁘셔서..."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민망하기도 하고 송구할 때도 있다. 때로는 멈추어 생각해 보기도 한다. 무엇 때문에 바쁘며, 정말 바쁜건가?
사람 나름이겠지만, 실은 목사의 아내들처럼 바쁘게 사는 사람들도 드물게다. 이 세상의 어떤 여인들이 이토록 바쁘게 사는 특권을 누릴 수 있을까?
하루 25시간을 사는 것도 아니면서 눈만 뜨면 바쁜 일들이 산적하고 잠자리에 들 때에도 다하지 못한 미진한 느낌을 애써 떨구면서 잠든다.
바쁘게 산다는 것이 괴롭고 비참하게 느끼는 이들에겐 한 없이 불행한 일일 것이나 감사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겐 황홀한 행복일 수도 있다.
목사의 아내들은 바쁘게 살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행복한 여인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나의 자존심이고 생활철학이다.
할 일이 없어 따분한 날을 지내본 적이 있는가? 오라는 사람도, 갈데도 없어 삶이 지루해 본 적은 없는가? 하루가 길다는 느낌으로 괴로와 본 적이 있는가?
프랑스 파리의 공원 양지바른 벤취에 죽을 때까지 먹고 살 수 있는 부자 노인들이 바쁘지 못한 불행을 앓고 있는 현장을 느껴본 적이 있다.
목사의 아내가 마지하는 한 날은 한주 단위로 쏜살같이 달아난다.
그런데 아무리 일이 많다해도 분명한 것은 우리 앞에 "해야할 일과 "하고싶은 일" 두가지 밖에는 없다. 이 둘중에 우리는 순간마다 우리의 할 일을 선택하게 되어있고 어떻게 선택하며 살았는가가 인생의 석양에 도달했을 때 성경이 말하는 "착하고 신실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지금 이 나이 되어서도 여전히 "하고싶은 일"만 선택하고 싶은 나 자신이 마땅치 않을 때도 있지만 "하고싶은 일" 마져도 못하게 되는 날도 있을테니 우리 앞에 "해야할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가 아닌 셈이다.
목사 아내의 삶을 살짝 펼쳐보면 이렇다.
아기가 없어 고통하는 이들을 위해 아기 주십사고 작정기도해 줘야하고, 조산되어 인큐베이터에 들어있는 아기를 방문하기도 하며, 아기 이름을 짓기위해 작명소를 차리고 밤새 옥편을 뒤지기도 한다.
백일된 아기집에서 아침밥을 먹어야 하는가 하면, 돌된 아기 사진관도 알선해야 하고, 초등학교 입학한 아기 책가방을 사주는 것 (모두 다 사줄수야 없지만)을 기억해야 할 때도 있다.
감기만 걸려도, 수술한 경우에도, 태어난 아기가 사람구실을 할 때까지 곁에서 함께 아기를 키우는 심정이다.
저들이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거들어야 하고, 가깝고 좋은 학교에 뺑뺑이를 돌리게 해주십사고, 또 중 고등학교에서 좋은 친구들과 사귀게 해주시고, 대학합격을 위해 이름부르며 작정기도에 동참한다.
좋은 배필을 중매하고, 결혼식땐 음식이 제대로 대접되도록 신경을 써야한다. 남편의 승진을 위해 기도해 주고, 실직한 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잘못 형무소에 들어가면 죄수 면회도 가야한다.
회갑, 고희잔치에도 가야하고, 화장터에서서 따뜻한 재를 뿌려야 할 때도 있다. 추도예배에 참석해야 하고 장례식때 찬송으로 고별도 한다.
셋방에서 이사만해도 내 일처럼 기뻐 설레이고, 하루 아침 망해서 올데 갈데없이 비참해지면 미쳐 기도 못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혼한 가정 때문에 아파야 하고, 의처증, 의부증환자들에게 시달리기도 하며, 바람난 짝궁들 때문에 한밤중 떨며 밤거리를 울며 헤메기도 한다.
가출한 사춘기 자녀들을 위해 다방을 뒤지고 오락장을 누벼야 할 때도 있고, 부부싸움 현장에서 버려진 아기를 데려다 잠을 재워야 할 때도 있다.
한마디로 항상 성도들의 삶 곁에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긴장감이 바로 목회자의 아내들이 누려야 할 삶이다.
이것을 피곤하다거나 괴롭게 생각한다면 목회자 아내의 자아는 어디에 있고, 어떻게 자아실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나의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라는 명제로 허무하고 자괴감에 묻혀버릴 것이다.
고작 목사 아내의 삶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잘 죽는 일상의 행복을 부추겨 주는 정도의 가치냐고 묻겠는가?
그들의 요구에 민감하기 위해서 심리학과 상담학이 필요하며, 그들의 영적승리를 위해서 신학과 신령한 기도 체험들이 요구되고, 그들의 괴로움을 감당하기 위해 윤리와 사회학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함께 기뻐하고 성숙해가기 위해 교육자가 되어야 하고, 싸우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정치학이 필요하고, 함께 나누어 먹을 줄 알도록 경제학이 요구되는 것 아닐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바쁜가? 또 어떤 일로 바빠야 하는건가? 날마다 만나는 삶의 현장에서 나의 손길과 마음과 사랑을 요구하는 이들을 위해 바빠야 하는것 아닌가?
나의 손길을 요구하는 그 곳이 바로 내가 나아가 점령해야할 영토요 그들이 바로 나의 인생에게 전 우주요 내가 건설해야 할 천국이 아닐까?
인류를 사랑하기는 쉽다. 자본이 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나의 시간을 바쳐야 하고 희생을 요구한다
시간은 생명이고 희생은 자기부정이요 십자가다. 나의 십자가를 안 지고 예수가 대신 지신 십자가 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할 수 있을까?
바쁘게 살 이유가 우리에겐 분명하다. 이것은 여성해방만큼 바쁘고 또 옳은 일이다. 잃어버리고 깨어진 본래적 사람의 형상을 찾아내어 사람답게 살도록 돕는 일을 위해, 오늘도 목사의 아내들의 심방가방은 활기차게 펄럭인다.
이것이 사회구원이요 이것이 개인구원이다. 여기에 남북 통일이 있고, 여기가 주님이 명령하신 나의 땅끝이다.
묵묵히 생각해 본다. 이 일들을 돈이 없어 못하는가? 힘이 없어 못하는가? 바빠서 못하는가?
바쁜것은 행복이다. 더욱이 해야할 일을 할땐 정말 행복하다. 행복한 이들의 힘을 합치면 더 행복해진다. 이 행복이 계속 시간을 더해가면 영원한 행복을 창조한다.
잘못 바쁘게 살았던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이 지구를 이제야 철 들어 싸매고 고쳐 보자는 환경운동! 때로는 정말로 바빠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몰라서 쓸데없이 바쁜 사람들이 남겨논 상처가 역사를 할퀴어 놓았다.
뭐라해도 한정된 짧은 생애에 제대로 바쁘게 살 소명을 깨닫고 산다면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 목사의 아내! 참 행복한 여인들이다.
남상순
인천YWCA 이사
청암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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