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오월.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 월드컵축구의 달 오월이 며칠 남기지 않고 지나간다. 다른해보다 한달쯤을 빨리 오는 것 같더니 가는것도 이리도 속히 달아날 줄이야. 이달에 내 가슴을 파고드는 시부모님에 대한 생각때문에 일기를 들춰보다가 아래 두편의 글을 찾아 내었다. 모두 가을날 써두었던 글들이라서 계절감이 없지만 내 가문의 머릿돌이셨고 힘겹게 일구어 온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려니 자꾸만 시부모님 내외분이 그리워져서 여기에 옮겨본다.
잊지 못할 시아버님!
가을비가 무던히도 퍼부어대고 있었습니다. 멀고 먼 진주 고향에서 시아버님이 임종하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온 가족이 여러날 간병에 지쳐있었고 아버님은 질긴 세상줄을 끊느라 고통하셨습니다. 객지에서 내외가 직장생활을 한다고 우린 가장 최후에 불려갔었죠. 여섯째 아들이었던 남편은 국내에선 망내였던 셈입니다. 실제 망내는 미국에 이민 가 있었으니까요. 직장에 결근계를 내고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얼굴이라도 뵈워야 한다고 가는 길이 어찌나 멀고 멀던지 마음이 급해서였겠지요.
지친 가족들은 우리가 당도하니 아버님을 맡기고 이리저리 장례준비와 친척들에게 연락전화를 걸러 마을로 가고, 일부는 작은 집에 가고...집안에 덩그마니 우리 내외만 남게 되었습니다. 괴괴한 어두움이 시골 집에 가득 스미고, 아버님은 마지막 숨을 몰아쉴듯 하다가는 다시 깊이 침륜되곤 하셨는데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이름들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내외는 문서화 해 두신 유언이 있었지만 혹시 어떤 말씀을 하실런지? 신경이 날카로웠습니다. 급하게 주변을 살펴도 가족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니 바로 아랫마을 작은 집에 간 사람들을 부를 겨를도 없었습니다.
아버님은 계속 출석 부르드시 이름을 부르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순서가 있었습니다. 평소 당신의 아들들 이름도 모르시는 분이셨습니다. 7형제를 부르실 때 "균아!~" 하시면 누굴 부르는지 알 수가 없었죠? 성품이 급하셨던 아버님인지라 챙겨부르실 재간도 없었지만, 경상도에선 자야!~ 균아!~ 끝짜만 불르는 것이 상례더군요.
그런데 큰집부터 시작해서 각집에 맏아이 이름을 불르시는데 끝자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부르시는 겁니다 순복아!~ 양애야!~ 영훈이!~ 이런식으로 내려갔죠. 내외는 눈을 껌벅거리며 마주보고 놀랬습니다. 우리는 여섯째니까. 은혜야!~ 라고 부르기를 예견하고 있었는데...이게 웬일입니까? '남상수이!~' 이러시는 겁니다.
남편과 나는 놀랐습니다. 이럴수가! 어찌 며느리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을까? 신비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했죠. 귀를 의심할 정도였지만, 남편도 함께 또렷이 들었습니다. 아버님이 너무너무 좋아졌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내 이름을 불러주신 그 사실 때문에...물론 해설은 필요 없었습니다 동서들이나 가족들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각집의 맏이들 이름을 부르시더라는 말만 전했습니다.
아버님은 그 밤에 우리 내외가 깨끗이 씻겨드렸고 큰 형님이 준비해 두셨던 좋은 수의를 입혀드렸습니다. 안팍에 20여명이 붐비고 있었건만 막상 임종할 때는 우리 내외만 함께했습니다 '임종하는 자식이 자식이란다' 하시며 어른들이 수고했다고 하셨지만, 나는 내심 비밀스런 추억을 하나 만들어 주신 아버님을 잊지못합니다.
그날 이후 남편은 지금도 종종 '남상수이!~' 하며 자각을 시켜줍니다. 아버님이 불러주신 이름인데 시댁에 잘 하라는 싸인이기도 하죠. 정말 아버님이 마지막 불러주신 그 이름 때문에 늘 아버님 산소에 갈 때마다 감격하고 나만이 느끼는 아버님에 대한 진한 향수가 젖어옵니다. "아버님 잘 할께요! 주씨 집안에 좋은 며느리가 될께요!" 그렇게 다짐 해봅니다.
그녀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어제 부산 다녀왔습니다. 시어머님 기일이었습니다 책 한권도 들고 가지 않았습니다. 오직 나의 시어머님! 그 분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죠.
남편을 낳아서 남편의 가슴에 영원한 고향으로 남아계신 그 어른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분은 깨끗했고, 알뜰했고, 대범했고, 말이 없으셨다." 이것이 모든 며느리들과 아들들에게 심겨진 추억이었습니다.
정말 깨끗하게 살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알뜰하게 살 수 있을까? 나는?
정말 대범하게 살 수 있을까? 나는?
그러면서도 말 없이 살 수 있을까? 나는?
코스모스 같은 여인이 아니었을까?
리무진버스로 공항 옆길을 돌아오면서...
단풍잎을 바라보았습니다. 인생의 가을에...
우리는 손을 좌악!~ 펼 줄 알아야 한다.
인생의 가을에...
우리는 시들줄도 알아야 한다.
인생의 가을에...
우리는 뚜욱!~ 미련없이 떨어질 줄을 알아야한다.
인생의 가을에...
우리는 밟히면서도 새날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인생의 가을에...
우리는 얼굴 붉히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인생의 가을에...
우리는 땅속으로 스며들면서도 절망하지 않아야 한다.
99년 10월 시어머님 기일에
남상순
인천YWCA 이사
청암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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