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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교회 원로/선교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명예교수,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한국세계선교협의회 공동회장

  제목 :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용서와 화해의 영성”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용서와 화해의 영성” 평화한국 세이레 기도회책자                    

저는 기독교 복음의 특성과 핵심은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의 영성 또는 은혜라고 행각합니다. 기독교 복음의 특성과 핵심은 올바른 진리의 선포이전에 은혜 선포와 은혜 베풂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 1:14은 성자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진리가 중요하지만 은혜가 먼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롬 16:20) 라고 축원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화해하시는 용서와 화해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귀중성을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성자 예수님께서는 저주받아 마땅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용서와 화해의 은혜를 베푸셨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군인들에게 용서와 화해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던 강도가 “예수여 … 나를 생각하소서” 라고 말했을 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용서와 화해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인 사울에게 나타나서 “사울아! 사울아!” 라고 부드럽게 부르시면서 그에게도 용서와 화해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처음에는 북한의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9년동안 후에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2년동안 목회를 하셨는데, 신의주에서는 일제하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평양에서는 공산당 정부와 협력하지 않는다고 대부분의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셨습니다. 신의주에서는 신의주 시내에 있는 감옥에서 복역하셨고, 평양에서는 평양외곽에 있는 사동 탄광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복역하셨습니다. 저는 유아시절과 유년시절에 아버지와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계실 때는 설교준비와 기도에 전념하셨기 때문이고 그리고 맨날 감옥에 가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따금씩 저와 함께 교회당 근처를 걸으시면서 저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하셨는데 제가 대답을 하면 대답을 아주 잘했다고 저를 칭찬해주시곤 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좀 심한 장난꾸러기였는데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가 잔소리를 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욕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신앙적으로는 철저하신 분이셨지만 인간적으로는 부드러운 분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탄광에서 감옥살이를 하시면서 같은 탄광에서 중노동을 하는 죄수들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베푸셔서 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교회와 감옥에서 말이 아닌 진실하고 따뜻한 섬김의 삶을 사셨는데 저에게 신앙적인 감화와 감동을 많이 주시곤 했습니다. 주일을 성수하며 예수님을 바로 믿고 섬기기 위해서는 맨날 감옥에도 가야 한다는 교훈을 아버지의 고난의 삶으로부터 배우게 되었고 고난 당하는 이웃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펴야 한다는 교훈을 아버지의 따뜻한 섬김의 삶으로부터 배우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평양 제5 인민학교를 2년 동안 다닐 때 일요일에 학교에 오지 않는다고 월요일마다 벌을 받고 정학을 당하면서도 주일성수를 끝까지 고수했던 이유도 아버지의 신앙적인 감화와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48년 7월 사동 탄광에서였는데 다음 달인 8월에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살고 아버지를 따라서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 11살 나이에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서 월남을 했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는 한 마디로 주님과 교회를 뜨겁게 사랑한 충성스러운 분이셨고 이웃과 원수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신 따뜻한 분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면서 설교하실 때 자주 인용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또한 아버지가 애창한 찬송가는 “환난과 핍박 중에도”(383장), “주안에 있는 나에게”(455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371장) 등이었습니다. 결국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북한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진실하게 목회 하시다가 45세에(1950년 6월 23일경) 평양 외곽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저는 주기철 목사님 최봉석 목사님 김화식 목사님 등과 함께 평양에서 순교 하시여 천국으로 가신 저의 아버지를 그리며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존경과 사랑의 글들을 쓰기도 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말이 아닌 고난의 삶과 순교의 죽음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고 예배하고 섬기는 삶이 무엇인지를 순수하고 진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말씀대로 아버지가 ‘강직’하시고 ‘진실’하셨는데, 저도 강직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동탄광에 계시면서 같은 탄광에서 노동하는 죄수들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베푸셔서 저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셨다고 하셨는데, 저도 부족하지만 고통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펴면서 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을 저의 삶의 소원과 기도로 삼고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먼저 가 계시고 어린 아들이 먼저 가 있는 천국을 늘 그리워하고 사모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만간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천국에서 반갑게 만나 뵙고 품에 힘껏 안기겠습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사실 저는 아버지가 당한 일제와 공산당의 박해로 인해 그리고 제가 어릴 때부터 당한 신사 참배 강요와 일요일 학교 등교 강요 등으로 인해 반일주의자와 반공주의자가 되었습니다. 12년 동안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서도 얼마 동안은 반일 반북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저의 입장과 자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니느웨와 땅끝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묵상하고 의인이 아니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성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그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들을 방문하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의 피 속에는 분노와 증오의 기운은 조금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스데반, 폴리캅, 토마스, 최봉석, 김화식, 김관주,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 등의 순교자들의 피에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향기만이 나타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일본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일본교회와의 교류와 협력을 이루는 일에 앞장을 서기도 했습니다. 고지 혼다, 하토리, 이쯔다, 후나키, 가시다, 쯔타다 목사님 등 일본 교회의 지도자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1991년 6월 4일 저녁 1200 여명의 일본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제3회 일본 전도대회 모임에서 설교하면서 저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고백한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저의 개인적인 감정을 여러분들에게 솔직하게 표현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 대해 뒤섞인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멀게 느껴지기도 하고 가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난날의 미움에 대한 느낌과 오늘의 애정을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1990년 AMC 대회에서 고백한 것처럼 저는 어렸을 때 일본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사람들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이 1905년 이후 우리나라를 점령했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심한 박해를 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이 많이 바뀌어졌습니다. 제가 지난 10여 년을 전후하여 알게 되고 사귀게 된 상당수의 일본 교회의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밤 깊은 감사의 마음과 여러분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 밤 또한 지난 저의 혐오와 미움을 고백하면서 섰습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형제로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날 밤 많은 사람들이 저의 사과를 눈물로 받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저는 1988년 여름 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에 가서 가뭄으로 죽어가는 그곳 모슬렘 주민들을 위해 우물 10여 개 이상을 파주는데 심부름의 역할을 했습니다. 1995년경부터 북한동포 돕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되었고 지금도 북한동포 돕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1999년경부터 중국 연변 지역의 조선족 고아 아이들 150 여명을 돕는 일도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습니다. 2005년에는 “악의 축” 이라고 불리던 아프가니스탄의 쿤두스 지역에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 하나를 지어주었는데 그곳 모슬렘 주민들로부터 뜨거운 감사를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 모두를 용서하고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와 화해하고 싶습니다. 제가 극심하게 비판하던 기장교단의 지도자들을 아주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제가 극심하게 반대하던 타 종교의 지도자들과도 친밀한 교제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용서와 화해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2007년 1월 3일 아침에 쓴 “사랑하고 싶어라” 라는 글을 인용합니다. “나는 요사이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한 평생 나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과 사랑이 어찌 그리 크고 어찌 그리 많은지! 실로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나의 가슴에 눈물을 자아낸다. 사랑하고 싶어라.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어린이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귀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저들의 얼굴과 마음과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어라. 모슬렘도 공산주의자도 상관이 없다. 저들은 모슬렘이나 공산주의 라는 불행한 유산에 쌓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일 따름이다.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2007년 1월 3일 아침 교회로 운전하며 오는 차 속에서 쓴 글).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의 영성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영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예배와 기도회를 중단하는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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