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술 권하는 사회》(1921, 개벽지 17호)가 생각납니다. 이 작품은, 1920년대의 소설가 현진건 씨의 초기 작품으로서 작가의 신변 이야기를 다룬 것입니다. 일제의 탄압 하에서 많은 애국 지성들이 어쩔 수 없이 절망하고 술을 벗삼게 되어 주정꾼으로 전락하는데, 그 책임은 바로 ‘술 권하는 사회'에 있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대취(大醉)하여 새벽 2시에 집에 들어온 남편에게 아내는 "누가 이렇게 술을 권했느냐"며 안타까워합니다. 남편은 "조선 사회가 술을 권한다"고 답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자 남편은, “아아 답답해!" 하며 또 다시 밖으로 나가고, 아내는 멀어지는 남편의 발자국 소리를 원망하며 중얼거립니다.“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에서의 답답하고 절망적인 한 지식인의 불안을 그린 1920년대 리얼리즘 소설 속의 상황이 근 8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역사의 퇴보가 아니라면, 매우 고약한 아이러니지요.
정말 세상이 술을 권하고 사회가 술을 권합니까? 혹시 세상이 아닌 내가, 사회가 아닌 내가 스스로 술을 권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 땅의 기독교인들을 지켜보면서 제가 느끼는 한 가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복음의 원칙'에 입각하여 '상황'을 극복하고자하는 치열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몇십 번씩 쉴새없이 변하는 '상황'에 입각하여 '복음'의 원칙을 조율하고 싶어하는 듯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점입니다.
술 문제도 예외는 아닙니다. 서울이 무섭다고 하니까 과천서부터 아예 스스로 기어버리는 식의 몸짓으로, 신앙고백도 나 몰라라, 그저 살아남기 위해 눈물겨운 몸짓을 하는 초라한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나오는 고백은, "세상과 사회(직장상사/선배)가 술을 권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 비겁한 책임전가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경우 다 제 손으로 술을 마시지, 물 고문하듯이 코를 틀어막고 누군가가 남의 목구멍에 술을 쏟아 붓지는 않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거의 모든 경우에, 술은 세상이나 사회(선배)가 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권하기(원하기) 때문에 마시게 된다고 보는데, 제가 잘못 보았는지요? 신앙의 원칙을 놓고 싸워보기도 전에 스스로 알아서 기면서 자발적으로 백기를 들고 직장을 요령껏 누비면서 스스로 "지혜 있게 처신"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사는 선배들일수록 더욱더 입에 침을 튀기며,
"하찮은 술 문제로 너무 많은 것을 잃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
"어쨌거나 술을 마셔가면서 불신자들을 전도해야지, 그런 문제로 신앙인이 너무 고립되는 것은 결국 이원론의 틀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바울을 보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처신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술꾼에게 전도하려면 부득이 함께 술을 먹어야하는 것"이라고, 순진한 후배들에게, 사단이 만세 부를 고춧가루 훈수를 골라가며 합니다. 물론 이등병 후배는 우선은 멀리 있는 것 같은 장군님보다 그 일등병 선배(직장상사)님의 말씀을 더 귀담아 듣게 되지요. 사실은 별 것 아닌 술 문제에서 스스로 알아서 넘어지는, 마른 수수깡 같은 형편없는 '제자도'로 언감생심 전도라니요? 정말 가당찮은 논리이지요. 지더라도 싸우다가 져야지, 스스로 알아서 백기를 드는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택할 바가 결코 아닙니다.
사회가 술을 권한다고 발뺌하실 겁니까? 그래도 세상이 술을 권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나라 국회청문회에서나 자주 등장하는 지겹고 낯뜨거운 오리발논리가 아닌가요? 정말 솔직하고 정직하게 말하면, 사실은 '나 스스로가' 술을 권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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